[이길상의 와인 다이어리] 타사키 신야의 한 마디, 김용희를 한국 최고 소믈리에로 만들다!

  • 입력 2009년 7월 13일 14시 59분


170여명의 참관객과 5명의 심사위원, 이들의 시선은 무대에 오른 단 한 명의 소믈리에에게 집중돼 있다. 믿을 건 오직 자신뿐이지만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어찌 부담스럽지 않을 수 있으랴.

오랜 경력의 능숙한 소믈리에가 브리딩을 위해 디캔터에 와인을 따르는 손은 덜덜 떨리고 있다. 제한 시간 안에 주어진 과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은 당혹스럽기 그지없고, 이 때문에 평소에 하지 않던 실수마저 나오고 만다.

지난 7일 서울 소공동 서울프라자호텔에서 열린 프랑스 농수산부가 주최하고 프랑스농식품진흥공사(소펙사)가 주관하는 ‘제8회 한국소믈리에 대회’ 최종 결선 현장에서 벌어진 모습이다. 3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최종 결선에 오른 8명의 소믈리에는 이론과 서비스 모두 상당한 실력을 갖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 25분의 시간 동안 블라인드 테이스팅 2가지(7분), 단체 고객 서비스(7분), 외국인 고객 응대(5분), 한국인 고객 응대(5분), 기타 질문(1분) 등 5단계의 과제를 제한 시간 안에 해결하는 일은 녹록치 않았다. 시험 과제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홀로 올라가 무대에서 풀어야 하는 상황이 극도의 긴장감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이 중 한 사람의 모습에선 전혀 긴장한 눈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당당한 모습에선 오히려 여유까지 느껴졌다. 이번 대회 우승자 김용희(가든플레이스 총지배인) 씨다. 2005년 4회 대회부터 연속해서 5차례 도전한 그는 마침내 한국 소믈리에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한 번도 참가하기 힘든 대회를 다섯 번 연속 도전한 집념, 그 뒤에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제가 좋아하고, 전문으로 하는 일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고 싶었습니다. 2005년 처음 나갔을 때는 필기에서 1등을 하고도 결선에서 상황 파악을 못하는 실수를 해서 굉장히 아쉬움이 컸는데요. 경기가 끝난 후 당시 심사 위원장인 타사키 신야(일본 출신 세계적인 소믈리에)를 복도에서 만났는데 ‘대회에 처음 나가서 1등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계속 대회를 치르고 연마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다. 그게 소믈리에의 자세다’고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그게 많은 동기 부여가 됐어요.”

국제소믈리에협회(ASI) 사무총장이자 소펙사 아시아 대표 장 샤를 크루앵 씨는 2단계 단체 고객 서비스에서 브리딩의 정확성과 10명에게 동일한 양으로 서비스한 점, 3단계 음식 매칭 시 카라멜 감귤 소스의 농어구이를 주문하고 와인을 마시는 여성 고객을 위해 깔끔한 맛을 내는 보이차를 추천한 순발력을 높이 평가했다. 적잖은 참가자가 시간 내 10명 모두에게 서비스를 하는 데 실패했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오히려 남았다.

“단체 손님은 업장에서 하듯 편안하게 한 게 점수를 딴 것 같아요. 스트레스는 없었어요. 자주 오는 분이 맡겨 놓은 와인을 서비스하는 거니까 간단하게 설명했죠. 여성에게 와인이 아닌 다른 음료를 추천하는 것은 사실 아슬아슬했어요. 음식과 맞는 와인으로 약간 바디가 있는 걸 계속 염두에 두고 있다보니까 잠시 여자 손님이 말하는 걸 놓치기도 했죠.”

그가 긴장하지 않고 실력을 발휘한 데는 5차례나 대회를 치른 사전 학습이 도움이 됐을 듯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달랐다.

이전 대회는 결선 상황에 대해 약간의 가이드라인이 주어졌지만 이번에는 어떤 정보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거다. “이번 대회는 실제 국제 대회와 똑같이 아무런 사전 힌트를 주지 않았는데 그게 참 맘에 들었어요. 대회를 많이 나가서 그런지 이번에는 굉장히 맘이 편했습니다. 그 전에는 안 되서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그래서 단련됐나 봐요.”

블라인드 테이스팅은 참가자들에게 여전히 힘든 과제로 남았다. 참가자들이 좋지 못한 점수를 받은 부분도 바로 블라인드 테이스팅이다.

그에게도 어려움은 다르지 않았다.

“레드 와인으로 나온 ‘코르나스’는 아주 탄닉하고 묽은 듯 한데, 10년 이하 코르나스는 제게 떫은 걸로 입력돼 있었어요. 이번 코르나스는 론 느낌은 있는데 순간적으로 잘못 생각한 게 보르도의 느낌도 살짝 들었어요. 피니시도 그렇고, 현기증이 날 정도였죠. 화이트 와인은 처음에는 리슬링이었는데 계속 마시다 보니 리슬링의 페트롤보다 약간 과실향이 있고…. 그래서 헷갈릴 수 있는 테이스팅이었습니다.”

그의 이력은 재미있다. 그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기타를 쳤고, 지금도 매주 금요일 오후 자신이 일하는 가든 플레이스 2층 와인바 ‘바153’에서 팀 ‘다블스’의 멤버로 재즈와 블루스를 연주한다.

2002년 연주하던 와인바 ‘쉐조이’ 안준범 사장의 권유로 연주와 함께 와인을 서비스하면서 배우게 된 그는 와인의 매력에 곧 빠졌고, 지금은 와인과 음악을 동시에 생활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놀라는 손님도 간혹 있다. 좀 전까지 와인을 추천하고 서비스하던 사람이 갑자기 기타를 메고 연주를 들려주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초반에는 적응 못하고 나가는 손님도 있었죠. 하지만 지금은 공연과 와인을 동시에 즐기는 손님들이 늘었습니다.”

와인이 붐을 이루면서 소믈리에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젊은이들도 있다. 이들을 위해 그는 정확한 조언도 잊지 않는다.

“소믈리에는 다른 사람들이 접시 나르고 있는데 와인 테이스팅 노트 적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 똑같이 스태프로서 일하면서 와인 관련된 전반적인 업무를 같이 하는 겁니다. 업장의 매출도 신경 써야 하고요. 프로페셔널한 와인 전문가이면서 판매하는 게 소믈리에이기 때문에 환상을 갖고 접근하는 건 힘들어요. 소믈리에를 할 건지, 와인 평론가를 한 건지 본인이 평가해서 구분을 잘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대회 우승으로 그는 오는 10월 싱가포르 소믈리에 대회와 11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제1회 아시아 오세아니아 소믈리에 대회’의 프랑스 트로피 부분에 참가하는 자격을 부여받았다. 국제대회에서도 좋은 성과를 내 넓은 무대에서 해외 소믈리에들과 함께 일하고 교류하면 좋겠다는 꿈을 드러내는 김용희 씨. 그의 바람이 현실이 되는 날, 한국 소믈리에의 위상은 새롭게 정의될 것이다.

이길상 기자 juna109@donga.com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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