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어리그 이야기]남과 북 ‘축구 유전자’는 하나다

  • 입력 2009년 7월 13일 03시 00분


월드컵 사상 두 번째로 분단국가가 본선에 함께 올랐다. 한국과 북한은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본선에 동반 진출했다. 1974년 서독 월드컵 때 동독이 함께 출전한 게 첫 역사였다. 당시 동서 냉전으로 갈라져 있던 두 독일은 서로 응원하며 월드컵을 즐겼다. 동독은 서독을 1-0으로 이겼지만 서독은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베를린 장벽은 이후로도 14년 동안 두 독일의 왕래를 막았지만 독일 월드컵은 이들을 하나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필자의 어머니는 서독에서 자랐다. 아들은 동독 출신 여자와 결혼했다. 고부간에는 미묘한 알력이 흐른다. 분단의 영향이다. 필자는 축구를 통해 한반도의 분단 상황도 경험했다. 남북은 수차례 한반도기를 들고 행진했다. 하지만 청소년 축구팀을 제외하면 진정한 한 팀으로 국제무대에 선 적은 없다. 한국과 북한은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에서 티켓을 놓고 전쟁을 치렀다. 축구는 막힌 장벽을 없애는 힘이 있다. 하지만 이번 최종 예선에서 남북은 이기기 위해 서로를 불신하는 지경까지 갔다.

○ 1966년 런던 월드컵 北활약 생생

필자는 1966년 런던 월드컵 때 처음 북한을 알았다. 북한 박두익이 골을 터뜨려 이탈리아를 무너뜨린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찬명은 반격에 나선 이탈리아 공격수들을 온 몸으로 막았다.

필자는 1996년 4월의 어느 아침 한강변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다. 이북 5도 축구단 멤버들과 함께 축구를 했다. 다들 연세는 지긋했지만 축구하는 솜씨는 수준급이었다. 당시 76세의 박형근 씨는 이태원의 스탠리 매튜스(잉글랜드 출신으로 50세까지 뛴 인물)로 불렸다. 늘씬한 몸매로 양쪽 사이드를 휘저었다. 노인인데도 절제된 동작과 균형감각으로 태클을 피하며 젊은 선수들을 농락했다. 한 젊은이가 “저분은 축구할 때면 팔팔해진다”고 말했다.

이 실향민들은 형제, 사촌, 친구들과 북에서 그랬듯 매일 아침 축구를 했다. 박 씨는 “한 번만이라도 북에서 축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게 안 되면 2002년 한일 월드컵을 통해 남북이 화해해 내 주검의 재가 황해도 축구장 골대 밑에 묻혔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박 씨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한국은 월드컵을 즐겼지만 북한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노인은 “이제 하나둘씩 저 세상으로 가고 있다. 하지만 북에 갈 수 있다는 꿈은 갈수록 더 희미해진다”고 한탄했다.

○ 가슴설레는 월드컵 동반진출

몇 년 뒤 나는 휴전선 근처에 있는 파주 축구대표팀 트레이닝센터(NFC)에서 거스 히딩크 감독을 만났다. 바로 옆 통일전망대에 가면 개성이 보였다. 단지 30km밖에 안 떨어졌지만 그 사이엔 양쪽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북쪽에선 ‘인민 해방’이란 노래가 흘러나왔다.

내년 남과 북은 인종 차별을 뛰어넘은 나라 남아공에서 만난다. 그때 남과 북이 맞붙을 수도 있다. 마음의 거리는 떨어져 있지만 남과 북의 축구 유전자는 한곳에서 나왔다. 이북 5도 축구단 멤버 같은 실향민 상당수는 이제 세상을 떠났다. 남과 북이 월드컵 본선에서 함께 뛴다는 사실에 얼마나 기뻐할까.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의 슬픈 현실이다.

랍 휴스 잉글랜드 칼럼니스트 ROBHU800@a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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