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엽]운 좋은 날

  • 입력 2009년 7월 13일 03시 00분


운 좋은 날이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습관적으로 휴대전화를 찾았는데 주머니가 허전했다. 순간 저장된 번호와 약속 등 오만가지 불안이 스쳤다. 집에 연락해보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그 버스가 100여 m 앞 신호등 앞에 멈췄다. 달려가 문을 두드리니 기사가 열어줬다. 얼른 올라타 운전석 뒤 두 번째 자리로 달려갔는데 없었다. 실망한 얼굴을 보고 기사가 “그 뒤(세 번째 자리)에 앉았다”고 말해줬다. 다시 가 휴대전화를 덥석 집었다. 그때 버스가 출발하려다가 잠시 섰다. 규정 위반인 듯했으나 기사는 내 출근을 걱정해줬다.

점심은 선배가 이끄는 대로 명동의 오랜 만두집(취천루)에서 먹었다. 그 선배는 KBS를 정년퇴직하고 정부 산하 기구의 홍보 자문을 맡고 있다. 선배는 일곱 살 때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그 집에 온 뒤 50년 넘게 다녔다. 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대물림했고 자그마한 가게 크기도 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맛이 옛맛 그대로라고 한다. 한 탁자에는 노년 부부가 입안 가득히 그 옛맛을 머금고 있었다. 합석한 또 다른 지인과 함께 교자만두와 물만두를 일곱 접시 먹는 동안 그 선배의 얼굴은 개구쟁이 소년으로 바뀌었다. 인연을 잘 챙겨온 그 선배는 퇴직 후에도 선후배들과 작지만 소중한 만남을 나눈다.

운수를 이야기하다가 그 선배가 최근 겪은 일화를 들려줬다. 서울 여의도에서 술을 마신 뒤 대리운전으로 경기도 분당 집에 와서야 가방이 없어진 걸 알았다. 귀중품은 없었지만 여권과 오래된 친구 같은 펜이 있어 대리 기사에게 부탁해 차를 돌려 가봤지만 허사였다. 이튿날 여권 재발급 등 귀찮은 절차를 알아보고 있는데 가방을 주운 이가 연락을 해왔다. 경위를 살펴보니 가방을 차 위에 놓은 채 출발했고, 차가 대방동 부근에서 커브를 도는 도중 가방이 떨어진 듯했다. 선배는 곧 그를 찾아가 고마움을 전할 것이라고 했다.

전날 택시를 타고 가면서도 비슷한 일을 들었다. 기사의 통화를 듣게 돼 사연을 물었더니, 이랬다. 한남동 유엔빌리지에서 중년 여성이 뒷좌석에 명품 가방을 두고 내렸다. 차를 돌려 그 부인이 내린 곳에서 한참 기다려도 나오지 않자 경비원한테 맡겼다. 전화는 가방을 찾은 여성이 한사코 답례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마지못해 약속한 기사는 “이렇게 안 해도 되는데…”라며 혼잣말을 여러 번 했다. 그 기사의 옆얼굴로 멋이 흘러내렸다.

하루 이틀 사이에 겪은 이런 일로 우리 삶이 얼마나 서로 기대어야 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일상의 팍팍함도 씻은 듯 사라졌다. 삶이란 게 이처럼 작은 것에 뭉클해지고 즐거워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날 밤 야근 도중 SBS 시사토론 ‘한국사회의 법치 무엇이 문제인가’를 보다가 그 기분이 깨져버렸다. TV에서는 전여옥 이종걸 의원 등이 (불법)시위와 공권력의 문제를 둘러싸고 각각 딴소리를 하고 있었다. 토론도 제자리를 맴돌았다. TV 토론 무용론도 오래됐지만 이날따라 TV는 소음에 가까웠고 토론자들은 집착의 무게에 눌린 듯했다. 사실 기자를 포함해 많은 이들도 그런 집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밤늦게까지 이런저런 단상을 하다가 PC 한구석에 메모해둔 구절이 떠올랐다. “우리들의 인생이란 한갓 풀 같은 것. 들에 핀 들꽃처럼 한번 피었다가도 스치는 바람결에 이미 사라져 그 서 있던 자리조차 찾을 수 없는 이상한 사람들의 이상한 꿈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최인호 소설 ‘이상한 사람들’의 작가 후기에서)

허엽 문화부장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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