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聖者와 대통령

  • 입력 2009년 7월 12일 19시 50분


미국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는 온정적인 자본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높은 임금을 주고서는 철강이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을 벌이면 굴복하기는커녕 공장 폐쇄로 맞섰다. 제철소에 용역업체를 끌어들여 파업을 분쇄하다 유혈극을 빚는가 하면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이민 노동자들을 채용해 노조를 무력화시켰다. 일주일에 7일, 하루 12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시켰다.

전기작가 조지프 월은 말년에 자선가로 변신한 카네기에 대해 “사회에 돈을 기부함으로써 그가 돈을 벌기 위해 저질렀던 일을 정당화하려고 했을 것”이라고 썼다. 카네기는 미국 47개 주에 3000개의 도서관을 세웠고 대학과 연구소에 거금을 기부했다. 홈스테드 제철소 노동자들을 위해 1901년 대형 연금펀드를 설립했다. 그는 요즘 돈 가치로 계산하면 수백억 달러를 사회공헌 활동에 썼다. 성자(聖者)는 시장에서 성공한 기업가가 될 수 없지만, 시장의 승자가 된 기업인은 자선을 통해 성자가 될 수 있음을 카네기가 보여주었다.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장학재단을 만든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회장은 카네기의 인생철학을 연상시키는 사람이다. 비행기 3등석만 타고 다닐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전 재산의 95%에 해당하는 6000억 원을 내놓아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을 설립했다. 그는 “돈을 천사처럼 벌지는 못했지만 천사처럼 쓰겠다”고 말한다.

버핏처럼 他재단 기부했더라면

이명박 대통령이 평생 모은 재산 331억 원을 출연한 청계장학재단은 규모만 놓고 보면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이나 관정이종환교육재단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삼성이 2006년 대국민 사과와 함께 내놓은 돈으로 만든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은 기금 7061억 원에 올해 256억7000만 원을 장학사업에 쓴다.

나는 이 대통령이 장학재단을 별도로 세우지 말고 관정이종환교육재단처럼 모범적으로 운용되는 재단에 기부했더라면 더 빛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현직 대통령의 장학재단은 필요 이상의 이목을 끌 수 있다. 미국 워런 버핏은 빌 게이츠가 설립한 ‘빌 앤드 멀린다 게이츠 재단’에 310억 달러를 기부했다. 세계 역사상 최대의 사회공헌기금을 다른 기업인이 운용하는 재단에 내놓은 것이다. 사회에 환원하는 마당에 내 것 네 것이 어딨겠나. 이런 면에서도 버핏은 상식을 뛰어넘는 현자(賢者)다.

청계장학재단 이사회는 대통령의 오랜 측근과 친구로 구성돼 있고 맏사위인 이상주 변호사도 들어갔다. 송정호 이사장은 “사립학교에 설립자의 건학이념이 있듯이 장학재단에도 재산 출연자의 뜻을 잘 알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송 이사장은 “이 대통령이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을 처음 밝힌 것은 1995년 저서 ‘신화는 없다’에서였지만 그전부터 오랫동안 간직했던 꿈”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샐러리맨 신화의 소박한 꿈은 지난 대선에서 축재과정에 대한 공방과 ‘돈 많은 사람이 권력까지 갖느냐’는 비판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과감히 던지는 카드로 쓰게 됐다. 이 대통령이 선례가 돼 공직 출마자에게 재산의 사회 환원을 압박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건전한 기부문화 확산에 기여하기보다는 정치적 부작용이 커질 우려가 있다는 견해도 들려온다.

버핏은 “시장경제는 참여자들에게 현저하게 균형을 잃은 보상을 한다. 특히 부자들에게 역량에 비해 과다한 몫을 준다”고 말했다. 그는 쓰고 남은 돈은 사회에 돌려줘야 할 보관증이라고 말했다. 카네기는 “부는 개인의 산물이 아니라 공동체의 합작 생산품”이며 자신은 관리인이라고 보았다. 펜실베이니아 서남부의 석탄과 미네소타 메사비 산맥의 철광석, 19세기의 인구 증가와 경제성장, 철도교통의 발달에 따른 강철 수요가 카네기의 기업가 정신을 만나 활짝 꽃핀 것이다. 이 대통령도 기업에서 거둔 성공을 정치로 연결해 대통령까지 되었으니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큰 수혜자라고 할 만하다.

대통령 역할 중 善行은 지엽적일 뿐

이 대통령의 결단이 메마른 사회에 나눔의 정신을 전파하고, 정치인에게 부에 관한 자세를 가다듬는 계기를 제공한다면 더없이 바람직한 일이다. 가족과 친인척들이 평생 모은 재산을 쾌척한 대통령의 뜻을 새겨 실천한다면 한국 사회에서 후진적 고질인 ‘친인척 비리’를 치유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성자 같은 기업인이 냉혹한 시장에서 승자가 될 수 없듯이, 대통령이 선행(善行)이나 자선으로 뜻을 세울 수는 없다. 대통령의 직분에 비하면 331억 원 장학재단은 정말 사적이고 지엽적인 일이다. 대통령은 5년 동안 이룬 국정 성적으로 평가받을 뿐이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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