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34>

  • 입력 2009년 7월 12일 13시 36분


제28장 눈보라, 이별

인간은 누구나 고아가 된다. 부모가 모두 죽고 혼자 남은 날, 하늘 아래 내 편이 없음을 새삼 느낀다.

앨리스는 석범이 '눈보라 뒤에' 마을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어머니 손미주가 위독하다는 사실 자체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노윤상 원장이 살해된 마당에, 또 '자연인 그룹'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노 원장의 유서까지 발표된 마당에 자연 생태주의들의 성지로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녀올게."

석범은 짧게 미소 지은 후 보안청을 나왔다.

왕할매 이윤정에 대한 믿음이 컸다. 그녀도 '자연인 그룹'을 후원하고는 있지만, 손미주의 목숨을 놓고 장난을 칠 위인은 아니다. 열에 아홉이 거짓이라고 해도 단 하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그는 가야만 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영원히 후회할지도 모른다.

일과를 마친 밤 9시에 특별시를 출발했다. 20세기 말에 닦은 낡은 길이 군데군데 있다고 해도, 밤을 꼬박 새워 서두르면 내일 아침 출근 시간까진 귀경할 수 있으리라.

"한 시간마다 보고 드릴게요."

노 원장의 죽음으로 비상근무에 돌입하였지만, 민선의 '달빛마을' 아파트에 잠복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앨리스가 한 시간마다 그에게 연락할 이유는 없다. 그녀는 이렇게라도 석범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석범은 쿼런틴 게이트로 접어들며 다시 민선에게 연락을 취했다. 역시 답이 없었다.

"받아…… 혼자 울지 말고."

오늘 오후 따로 장례식은 치르지 않고 화장한 뼈를 북한산 나무 아래에 흩뿌렸다. 석범은 더 오래 곁에 머물고 싶었지만, 민선은 혼자 있겠다며 고개 저었다. 아버지를 원망해서 스스로 '고아'의 길을 택했지만, 피붙이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무척 큰 듯했다.

저녁은 먹었나? 골방에서 혼자 엎드려 울고 있지는 않을까?

사소한 걱정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앨리스를 비롯한 보안청 형사들이 '달빛마을'을 지키고 있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미디오스피어를 통해 민선이 노윤상의 황금 슈트에 다가가는 모습이 전 세계로 방송되었다. 살인마 역시 이 방송을 보며 즐겼으리라.

역시 자연인 그룹이었나? 글라슈트는 '배틀원 2049'에 참가 로봇 가운데 주최 도시인 서울특별시에 있는 연구소에서 만든 로봇이다. 서울을 대표하는 일은 금지되어 있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과거의 '상징 코드'에 젖어 글라슈트와 서울을 연결시켰다.

살인마는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노리지 않았을까.

수사망이 앵거 클리닉으로 좁혀오자 노 원장을 죽여 아예 심층 수사의 가능성을 막아버리고, 글라슈트 팀원인 민선을 위기에 빠뜨림으로써 '배틀원 2049'를 지지하는 자들에게 경고 메시지를 날린 것 아닐까. 그런데 범인은 민선이 노 원장의 딸이란 걸 어떻게 알았을까. 범인이 노 원장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고 또 자연인 그룹의 일원이라면?

그때 석범의 뒤통수를 치고 지나가는 풍광이 있었다.

'부엉이 빌딩'이 무너지고 <보노보> 방송국에서 폭발물이 터지던 날, 방송국에서는 '배틀원 2049' 개최 논란에 대한 좌담회가 생방송으로 나가고 있었다. 찬성 쪽 패널은 최볼테르와 찰스였고, 반대 쪽 패널은 노윤상과 손미주였다.

노윤상과 손미주!

두 사람이 참석한 것은 우연일까. 초청 자체는 방송국의 선택이었다고 해도, 두 사람은 혹시 오래 전부터 서로를 알지 않았을까.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풍광 하나가 덧씌워졌다.

"UFO!"

로봇이 운영하는 레스토랑 'UFO'에서 석범과 민선은 맞선을 봤다. 석범은 미주가 강권했고, 민선은……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노 원장이 공부밖에 모르는 고집쟁이 딸을 설득해서 내보냈다면? 이게 사실이라면? 노윤상 원장과 손미주 여사는 안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돈 맺기를 원할 만큼 가까운 사이다. 돈독하던 사이가 잇단 테러와 연쇄살인의 과정에서 틀어져버린 거라면? '로봇'과 '게임'의 폐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손미주 여사 쪽이 노윤상 원장으로부터 자료를 넘겨받아 '미성여자고등학교 동네 한 바퀴'의 살인자들을 찾아내서 살해한 거라면? 그러다가 손 여사 쪽에서 '배틀원 2049'와 로봇에 대한 의견 대립 때문에 노 원장을 제거한 거라면?

그때 스마트카폰이 반짝이며 민선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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