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육정수]북핵의 약발

  • 입력 2009년 7월 10일 20시 33분


8일 평양체육관에서 열린 김일성 15주기 중앙추모대회에 참석한 김정일의 모습이 몹시 수척했다. 북한 정권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는 듯했다. 입은 비뚤어져 있고 다리는 절룩거렸다. 언젠가 그 자리를 이을 가능성이 있는 3남 김정운의 어린 시절 앳된 얼굴이 겹쳐졌다. 3대 세습이 실현될 것인지, 아니면 2대에 그치고 말 것인지, 김정일 자신에게도 불확실한 미래일 것이다.

北의 정세판단 시스템 고장 났나

북한은 올 들어 여러 차례 세계를 놀라게 했다. 4월 5일 사거리 3200km의 로켓을 태평양 상공으로 쏴 올렸고, 5월 25일엔 2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엔 미사일 7발을 동해로 발사했다. 올해 총 18발의 미사일을 동해와 서해로 쐈다. 두만강 주위에서 취재 중이던 미국 여기자 2명을 납치해 노동교화형 12년에 처하는 ‘재판 쇼’를 벌이고, 개성공단에서 일하던 현대아산 직원을 억류해 104일째 풀어주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련의 무력시위로 보상을 얻어내려던 계산은 빗나갔다. 북의 최대 장기(長技)인 ‘벼랑 끝 전술’의 약발이 다한 느낌이다. 과거 북이 주요 고비마다 핵과 미사일 장난으로 무기 개발의 시간을 벌고 보상도 얻어내는 성과를 거둔 것과는 딴판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정부의 철저한 무시 전략 때문이다. 그래서 김정일의 병세 악화로 정세 판단 시스템에 큰 고장이 난 게 아니냐는 관측까지 제기된다.

더 이상의 카드는 별로 없어 보인다. 새로 내민 것이 한미 양국의 주요기관에 대한 사이버 테러라는 분석도 나오지만 북측 소행인지는 불분명하다. 북이 획책했다면 사이버 공격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보완 대책을 마련하는 계기만 제공했을 뿐이다.

물론 북핵 문제가 가까운 장래에 풀릴 가능성은 희박하다. 어떻게 해야 하나. 오바마 정부에 영향력이 큰 제임스 프리스텁 미 국방대 교수가 7일 한국전략문제연구소(소장 홍성태) 주최의 국제 심포지엄에서 한 얘기가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 주었다. ‘북핵 문제가 동북아 전략균형에 미치는 영향’이란 주제의 발표에서 그는 “당분간 북핵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북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자는 게 아니라 비핵화 방안을 중장기적 관점에서 모색해야 한다는 뜻이라는 설명이었다. 6자회담의 문이 항상 열려있다는 자세를 견지하되, 북에 새 리더십이 등장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군사적 급변사태에 대비하는 ‘작전계획 5029’ 차원을 뛰어넘는 총체적 논의를 본격화해야 한다고 그는 주문했다.

프리스텁 교수는 오바마 정부의 선택방안으로 △군사적 공격 △외교적 노력을 중단하는 ‘선의(善意)의 무시’ △경제 제재로 정권교체를 시도하는 ‘적대적(敵對的) 무시’ 전략을 들었다. 하지만 군사력 사용은 보복공격에 대처해야 하고, 선의의 무시는 북에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으며, 적대적 무시는 중국의 협조를 얻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한미동맹 강화만이 우리의 살길

북이 핵을 개발하는 이유는 핵 포기 대가로 대미(對美) 수교나 경제적 지원을 받는 ‘빅 딜’에 있지 않다. 단기적으로는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고 3대 세습에 성공해 정권을 지키는 데 있고, 궁극적 목표는 적화통일이다. 핵을 포기할 리가 없다. 북이 6자회담을 통해 완전한 비핵화를 이루고 인민을 위한 경제성장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우리의 뜻과는 너무 멀다.

한 가닥 희망은 중국이 쥐고 있다. 중국도 핵을 가진 북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핵무장 도미노가 현실화하지 않는 한 대북(對北) 영향력 행사를 꺼릴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프리스텁 교수의 말처럼 우리가 북핵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면 미국의 ‘확장된 핵억지력(extended deterrence)’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러자면 한미 동맹을 더 강화해야 한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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