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현우]대통령의 비우기와 채우기

  • 입력 2009년 7월 9일 03시 00분


좋은 의미에서 오비이락(烏飛梨落)이었다. 리더십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에서 대통령이 사재 대부분을 사회에 기부한 일은 긍정적인 효과를 줄 것이다. 대통령의 의지는 일관적이었겠지만 대통령 지지도가 상승 분위기에 있는 시점에서 기부를 실천했다는 점이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다. 언론뿐만 아니라 야당마저 이번 기부에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대운하 포기 이후의 재산 기부

같은 사실이라도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만일 대통령이 작년 촛불집회 때와 같이 정치적 위기 시절에 재산을 기부했다면 정치국면의 전환을 꾀하려는 의도로 해석됐을 것이다. 대통령이 국민과 가깝게 다가서겠다는 의사를 밝힌 시점에서 재산 기부는 진정성을 강화시켜 주게 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재단 이사진이 대통령 측근 인물로 짜여졌다는 사실이다. 기부 액수보다 더 부각되는 것이 대통령의 약속 이행과 기부문화의 확산인데 공익성을 강조하려면 대통령과 사적인 관계가 없는 사회적 명망인사가 다수 포함돼야 했다. 재단의 사업 내용이 고도의 판단을 요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불우한 학생을 지원하는 장학사업이라면 전문성보다는 도덕성이 높은 인사가 참여하는 모습이 더 상징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통령이 주변 인물만 중용한다는 세간의 인사정책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수 있는 아쉬운 기회였다.

넓은 관점에서 보면 이번 기부 결정은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을 줄인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성공적이다. 대통령이 리더십을 강화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가 정치부담을 줄여가는 일이다. 첫걸음이 대운하 건설에 대한 전향적인 태도였다. 대통령이 대운하 건설에 더는 집착하지 않겠다는 명백한 발언이 정부에 대한 비판의 한 축을 무너뜨렸다. 강하게 추진하던 정책을 포기한 사실이 대통령의 정치부담과 반대를 감소시켰다. 대통령 리더십의 좌절로 보거나 정부 비판세력의 입지를 강화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대통령이 국민의 우려를 수긍했다는 점에서 대통령에 대한 평판이 높아졌다. 대통령이 비울수록 더 넓은 입지를 확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됐다.

대통령의 재산 기부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07년 12월 대선후보 시절에 공개적으로 언급한 사회 기부의 약속을 지키는 데 1년 6개월이 걸렸다. 그동안 심심치 않게 대통령의 약속 이행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물론 국민이 재산 기부 때문에 지난 대선에서 이 대통령을 뽑지는 않았지만, 어찌 보면 약속을 지킨다는 당연한 사실에 대해서도 국민은 긍정적 평가를 하고 있다.

설득의 정치 아닌 공감의 정치를

요컨대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보내는 이들 중 상당수는 대통령이 어떤 리더십을 보이는가에 따라 지지자가 될 의사를 갖고 있다. 취임 이후 급락한 지지도가 어렵사리 상승세를 타고 있다. 대통령이 비우는 정치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제는 비우는 일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오히려 그 비운 공간에 무엇을 채울지를 보여줘야 한다.

대통령이 말하는 실용적 중도가 보수와 진보 사이의 완충지대가 아니라, 당면한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상대적 우위성이 있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출발점은 대통령이 항상 국민과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신뢰를 쌓는 작업이다. 대통령이 정치적 유연성을 가질 때 국민은 대통령의 리더십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요인은 설득의 정치가 아니라 공감의 정치(compassionate politics)라는 사실을 이번 일을 계기로 실감하기 바란다.

이현우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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