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31>

  • 입력 2009년 7월 7일 14시 00분


선택은 '가장 큰 이익을 얻기 위해 여러 가능성들 중에서 자유롭게 하나를 고르는 것'이라고 『특별시연합공용어사전』에 나와 있지만, 선택이 자유가 아닌 경우가 훨씬 많다. 사람이 사람을 선택하는 일이야 시비 걸 문제가 아니지만, 때론 아바타가 사람을 선택하고 로봇이 사람을 선택하고 시체가 사람을 선택한다면? 선택당한 이는 어찌 해야 할까. 무시하고 지나가기엔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 그렇다고 선택을 따르기엔 곳곳이 속임수고 함정이다.

무릎을 접어 사다리 한 칸을 더 올라서는 순간, 폭죽 소리와 함께 뇌 스크린이 갑자기 켜졌다. 강제작동을 한 것은 석범의 뇌 스크린 뿐만이 아니었다. 로봇 방송국 전체 스크린에 모차르트 교향곡 41번 '쥬피터'가 울려나왔고, 옥상에서 상징탑을 초조하게 올려다보는 민선의 얼굴이 잡혔다. 그 아래 자막이 출렁출렁 물결처럼 흘렀다.

귀여운 아이야, 이리 와서 나랑 가자!

아주 멋진 놀이도 너와 함께 할게.

울긋불긋 꽃들도 해변에 만발하지.

우리 엄마는 황금의 옷도 많이 가지고 있단다.

살인자가 원하는 이는 민선이었다. 석범의 움직임을 정확히 알고 민선의 창백한 얼굴을 전 세계에 내보낼 만큼, 그는 가까이 있었다. 살인자의 의도를 확인한 이상, 석범은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형사들은 곧바로 내려오라 독촉했지만 쉽게 따를 석범이 아니었다.

"내가 가겠어요. 내 아버지니까요."

민선이 나섰다.

"안 돼. 폭발물 제거는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야. 미끼야 이건."

석범이 강하게 만류했다. 상기된 얼굴과 함께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까지 다시 스크린으로 옮겨졌다.

"특별시민의 의무조항을 잊진 않으셨죠? '특별시민은 특별시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다.' 미끼든 뭐든 지금 아버지에게 다가갈 사람은 저뿐이에요. 살인자가 강력히 메시지를 보냈음에도 석범 씨가 다가가면 무서운 재앙이 닥칠 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제가 할 일이었어요. 제가 하게 해주세요."

석범은 공공접속을 끊고 민선과 단 둘만 이야기를 주고받고 싶었다. 그러나 강력한 힘이 둘 만의 비밀접속을 막았다.

특별시민의 의무? 내겐 당신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해.

이렇게 강조하며 끝까지 만류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처럼 우왕좌왕하는 보안청 검사의 모습을 범인이 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무대 위의 피에로가 따로 없었다.

석범은 상징탑 40미터에 매달린 채 다시 15분을 흘려보냈다. 그 15분이 150분 아니 1500분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40미터 25미터 15미터 10미터.

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탑이 움직일 때마다 민선의 몸도 꽃대롱에 붙은 꿀벌처럼 흔들렸다. 석범은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문 채 아래를 노려보았다. 민선의 두 발이 모두 사다리 바깥으로 튕겨나갔다가 겨우 제자리를 찾았다. 그녀는 이마에 땀을 닦으며 고개 들어 미소부터 지었다.

4미터 3미터 2미터 1미터.

석범이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민선은 그의 품에 안겨 거친 숨을 내쉬었다.

"미안해."

석범은 그녀의 손을 꼭 쥐고 속삭였다.

"약속해줘요. 내가 한 걸음 오를 때마다 당신은 열 걸음 내려가겠다고. 내 손이 황금 슈트에 닿을 때 당신은 <보노보> 방송국에서 멀리멀리 벗어나겠다고."

"절대 안 돼."

석범은 그녀의 부탁을 단 칼에 잘랐다. 그녀를 여기까지 올라오게 만든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그녀 혼자 두고 자기만 살겠다고 방송국을 떠날 수는 없다.

"당신 혼자선 불가능해."

"혼자 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석범 씨가 도와주셔야죠. 반경 3킬로미터 안에선 0.1초의 오차도 없이 바로바로 접속하여 의견을 나눌 수 있답니다. 같이 하는 거예요. 석범 씨가 가르쳐주면 제가 행동으로 옮기는 거죠. 꼭두각시놀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100년도 훨씬 전 아주 아주 원시적인 로봇이라고 여겨도 좋아요."

"민선 씨는 로봇이 아니야."

"알아요. 전 로봇이 아니죠 물론. 그러니까 제 말 들어요."

"그래도……."

"어차피 9미터 아래 머무는 거나 3킬로미터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라면, 석범 씨가 저라면, 어느 쪽을 택하겠어요? 가세요,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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