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사승]미디어 공공성의 계산

  • 입력 2009년 7월 7일 02시 57분


미디어는 사회적 재화다. 사회적 이슈를 사회 전체 이익의 차원에서 다룬다. 경제학은 또 다른 관점에서 미디어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한다. 미디어 상품은 공공재라는 얘기다. 첫째, 비경쟁성 때문이다. 여러 사람이 같은 프로그램을 본다고 프로그램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둘째, 비배제성 때문이다. 내가 프로그램을 본다고 다른 사람이 못 보지 않는다. 사적 재화와 정반대다. 빵과 비교해 보라. 내가 한 입 베어 물면 빵 가치는 떨어지고, 내가 먹을 때 다른 사람은 먹지 못한다. 그러나 공공재는 많이 소비할수록 가치가 더 커진다. 공공재 성격은 미디어 공공성 논리의 바탕이 된다. 소유규제, 시장진입규제 등 이런저런 규제는 공공성 논리에 의해 뒷받침된다.

이전투구 같은 정치판의 미디어법 논란은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가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정치싸움에도 불구하고 논란의 본질은 공공성과 규제에 대한 엇갈린 인식이라는 점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정치판이 내놓는 이야기가 어디에 하자가 있는지 판단할 수 있다.

공공재 논리를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이 논리는 미디어 상품의 소비과정만 고려했음을 이해해야 한다. 생산자인 미디어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미디어 상품은 공공재가 아닌 사적 재화의 특성이 더 크다. 광고라는 독특한 매출 메커니즘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미디어 기업은 미디어 상품의 생산비용을 소비자가 직접 지불하는 이용료로 모두 충당하지 못한다. 신문의 경우 생산비용과 판매비용은 터무니없이 역전되어 있다. 신문 한 부를 더 팔 때마다 손해가 더 나는 구조다. 미디어 기업은 대신 이 손해를 광고로 보전한다. 광고 수입이 거의 전부인 방송은 두말할 것도 없다.

野‘언론 융합시대’ 외면 말아야

광고는 공공재 논리와 거리가 한참 멀다. 하나의 광고주가 특정 지면이나 시간을 사들여 광고를 내보내면 다른 광고주는 그 지면과 시간에서 배제된다. 광고주는 지면과 시간, 그것도 더 좋은 지면과 시간을 구매하기 위해 경쟁을 벌인다. 더 많은 광고비를 제시해 경쟁에서 이기고자 한다. 지면이나 시간을 무한정 늘릴 수 있다면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발행비용 때문에 지면은 제한되고 법적인 규제로 방송광고시간은 한정된다. 광고시장에서 비경쟁과 비배제의 논리는 설 땅이 없다. 경쟁에서 이겨 상대방을 쫓아내야 하는 철저한 사적 재화의 논리만 존재한다.

광고 메커니즘을 포기할 수 없는 한 미디어 상품은 공공재인 동시에 사적 재화라는 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미디어산업은 그만큼 복잡하다. 미디어 상품의 소비현상을 강조하면 공공성을 위한 규제를 강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기업 활동의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입장에서 보면 규제는 불합리한 처사일 수밖에 없다. 어느 사회든 양자 사이에서 줄타기는 존재해왔고, 어느 쪽을 택하든 나름대로의 명분을 가질 수 있다. 현재의 논란은 이 미묘하고도 복잡한 현상을 한쪽에서만 보려는 애꾸눈 사고가 빚어냈다.

정부여당이 규제완화에 방점을 두는 모습은 생산의 사경제적 상황이 긴박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정부의 입법 방향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야당의 논리는 소비의 공공성을 주장한다. 미디어 상품의 복잡성을 생각하면 야당의 무조건적인 반대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소비의 공공성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미디어 기업이 충분한 여력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의 미디어산업 상황, 환경, 구조는 이런 변화에 대처할 능력을 강화시키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유급휴직이라는 단기처방에까지 이른 신문 산업의 형편을 보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정부, 수치근거로 타협안 제시를

더는 의미가 없는 아날로그식 매체 구분에 매달려선 안 된다. 미디어만큼 기술의존적인 영역이 없다는 말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융합으로 치닫는 미디어기술의 발전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를 부인한다면 야당의 인식은 오류 그 자체일 뿐이다. 정부여당의 한계는 한심한 정치력이다. 충분한 명분을 갖고 있음에도 이를 타협으로 성사시키지 못하는 현상은 정치력 부족 외에 그 무엇도 아니다.

어떤 사안이든 타협이 필요하지만 이 문제는 특히 그렇다. 타협이라는 말을 적당하게 나눠먹으라는 식으로 들어서는 안 된다. 상황과 환경과 변화의 흐름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일을 목적으로 정확한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정밀하고 전문적인 판단력이 중요하다. 어설픈 셈이나 무지한 억지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 확실한 근거를 가진 정확한 수치로 달려들어야 한다. 이를 숫자놀음이라고 함부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 현실적으로 타협이란 결국 숫자를 통해 이뤄진다. 쓸수록 가치가 커지는 공공재의 논리를 지키고자 한다면 고민이 담긴 계산을 해야 한다.

김사승 숭실대 언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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