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태우]평화적 核주권, 첫걸음은 신뢰

  • 입력 2009년 7월 7일 02시 56분


북핵 위협이 가중되면서 우리 사회 일각에서 핵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런 시기에 “완전한 핵연료 주기를 인정받는 방향으로 한미원자력협정을 개정해야 한다”는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2일 발언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시기적 미묘함에도 불구하고 유 장관의 발언은 핵무장론과는 상관이 없다.

18년전 ‘농축-재처리’ 포기 선언

군사적 핵주권이란 핵무기를 가질 권리라는 의미로, 북한이 핵무기로 우리를 위협하니 우리도 핵무기로 대응하자는 논리에서 출발한다. 반면 평화적 핵주권이란 평화적 원자력 이용에서 제약받지 않을 권리를 말하며, 핵무기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과거 한국의 핵주권 논의는 평화적 핵주권과 군사적 핵주권의 혼동으로 점철됐다.

핵확산금지조약(NPT)의 회원국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한국은 여기에 더해 1991년 노태우 대통령이 발표한 비핵화공동선언과 남북한이 서명한 비핵화공동선언을 통해 농축과 재처리를 포기했다. 농축은 핵연료 생산의 핵심과정이고 재처리는 사용한 폐연료봉의 재활용 및 환경적 처리를 위한 필수과정이지만, 핵무기를 생산할 때도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찰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다. 원자력 의존도가 큰 한국으로서는 사찰하에 이런 시설을 보유하는 게 당연하지만, 노태우 정부는 북한의 핵개발을 만류하는 데 유리하다면서 농축·재처리 포기를 천명했다. 당시 필자는 “농축·재처리를 포기하면 수십 년간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대부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핵주권 논의가 재현되고 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해 NPT상 불법인 군사적 핵주권은 한국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전력생산의 40%를 원자력에 의존하는 한국이 평화적 핵주권을 확보하는 일은 시급하지만 따져봐야 할 대목이 적지 않다.

첫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충분한 대미 협의가 중요하다. 전략동맹 구축, 핵우산 강화, 전시작전통제권 분리 등 중요 현안이 산적한 현 시점에 동맹 추스르기 차원에서도 필요하지만, 미국이 모든 대량살상무기 비확산 장치를 주도하는 국가라는 현실적 고찰도 필요하다. 1980년대 일본이 ‘포괄적 동의방식’하에 플루토늄 생산까지를 포함하는 모든 원자력 활동을 인정받은 일은 돈독한 신뢰에 더해 미래를 내다본 나카소네 야스히로 같은 지도자를 가졌기에 가능했다. 둘째, 북한 같은 나라가 합의를 무시하고 핵 보유를 강행함에 따라 지금은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이 농축·재처리의 확산을 불법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므로 한국으로서는 이런 국제핵정치의 파고를 넘어야 한다. ‘잘못 끼운 첫 단추’ 때문에 치러야 하는 비용이다.

찬물 끼얹는 ‘군사적 핵주권론’

요컨대 합법적인 핵 활동을 확보하는 일은 시급하지만 지금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우선은 복잡한 국제정치 현실을 경시한 채 “반미면 어떠냐”는 식의 단순감정을 표출했던 지난 정부를 미국이 어떻게 생각했을지 되돌아보고 한미 간 신뢰가 충분히 회복되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스스로의 역량도 확인해야 한다. “정치인이 주장하면 오해받으니 과학자가 주장해야 한다” 정도가 우리의 인식 수준이라면, 이는 상대편의 수준을 폄하하는 일로 아직도 평화적 핵주권을 찾을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언론이 불법과 합법의 범주를 넘나들면서 군사적 핵주권론을 부추기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평화적 핵주권의 확보는 우리가 가진 지렛대와 국제적 신뢰를 통해 합법적 영역의 활동을 인정받는 과정이다.

김태우 한국국방연구원 국방현안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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