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그리는 기술 대신 생각의 방법을 배웠죠”

  • 입력 2009년 7월 6일 02시 57분


‘빅앤트 인터내셔널’의 반전 캠페인 ‘뿌린 대로 거두리라’. 사진 제공 빅앤트 인터내셔널
‘빅앤트 인터내셔널’의 반전 캠페인 ‘뿌린 대로 거두리라’. 사진 제공 빅앤트 인터내셔널
5大국제광고제서 12개賞휩쓴 ‘빅앤트’ 박서원 대표
한국-미국서 방황하다 뒤늦게 디자인-광고 공부
“놀만큼 놀아본 경험이 내 창의력의 원천”

공부에는 도무지 흥미가 없었다. 남들이 다 간다고 해서 진학한 경영학과. 1학년 1학기 첫 수업을 들어보고는 아예 학교에 관심을 끊었다. 클럽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훌쩍 여행을 떠나거나. 원래 대학생활은 그런 것인 줄 알았다. 첫 학기 성적표에 학사경고가 찍혀 있었다. 다음 학기에도 학사경고를 받고는 자퇴를 결심했다.

도피 반, 희망 반 시작한 미국 유학생활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적성을 찾아보려고 매년 전공을 바꿨다는 것. 사회학과, 심리학과, 기계공학과…. 광고·디자인회사 ‘빅앤트 인터내셔널’ 박서원 대표(30·사진)의 3년은 또 그렇게 의미 없이 흘러갔다. 2001년 우연히 산업디자인 강의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 글로벌 광고제 돌풍의 주인공

지난달 27일. 뉴욕 광고제에서는 한 반전(反戰) 포스터가 옥외광고 부문 그랑프리로 결정됐다. 지난해 12월 미국 뉴욕과 워싱턴에 나붙은 이 포스터는 한 병사의 총구가 기둥을 휘감은 뒤 자신을 향하고 있는 사진이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What goes around comes around)’라고 적혀 있다.

이 작품의 뉴욕 광고제 그랑프리 수상은 ‘화룡점정’이었다. 이 포스터는 이미 클리오 광고제 금상, 뉴욕 원쇼 광고제 금상(디자인 부문)과 은상(공익광고 부문), 영국 D&AD 포스터 부문 수상, 칸 광고제 은사자상 수상 등으로 올해 가장 주목받는 옥외광고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5개 국제 광고제에서 모두 12개의 상을 받았다. 아직 한국에는 단일 작품으로 국제 광고제에서 이렇게 많은 상을 받은 예는 없다.

박 대표는 이 광고의 제작자다. ‘빅앤트’는 그가 뉴욕의 ‘스쿨 오브 비주얼아트(SVA)’ 2학년이던 2006년 ‘다국적 동창생’ 4명과 설립한 회사다. 본사는 지금도 직원 10명 남짓의 작은 회사다. 서울에도 지사를 냈고 현재는 중국 베이징(北京) 지사도 준비 중이다.

○ “생각하는 법을 먼저 배워 다행”

한국에서 “정말 원 없이 놀았다”는 박 대표는 미국 유학 3년 만에 우연히, 그러나 운명적으로 디자인과 광고에 빠졌다. 재미 삼아 들어본 산업디자인 수업이 인생을 바꿨다. 본격적으로 디자인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일단 귀국해 병역을 마친 뒤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26세에 SVA 시각디자인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뒤늦은 공부를 따라잡기 위해 남들보다 스무 배는 더 열심히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각디자인은 광고와 뗄 수 없는 관계다. 친구들과 모여 광고 아이디어를 주고받았다. 더 많은 사람에게 아이디어를 알리기 위해 회사를 세웠다. 올해 드디어 ‘대박’을 터뜨렸다.

‘빅앤트’의 창의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박 대표는 이 질문에 엉뚱하게도 “어렸을 때 미술을 배우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답했다. “어린 시절 미술을 시작한 한국 학생들을 보면 어느 외국 학생도 따라오기 어려울 정도로 그림을 잘 그려요. 그런데 디자인을 하라고 하면 그림을 먼저 그리고 그 뒤에 생각을 맞춥니다. 자신 있는 부분이 생각이 아니라 그림이니 당연하지요.” 그는 “내가 배운 것은 그림 기술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 “아이디어 특수부대 세우고 싶어”

또 하나, 그는 ‘다양한 경험’을 창의력의 원천으로 꼽았다. 그는 “놀 만큼 놀면서 겪은 일들이 작품에 녹아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그 경험을 어떻게 표현하느냐다. 거의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새 아이디어를 구상하거나 메모하는 것도 그의 경험을 끄집어내기 위한 과정이다.

그의 작업 스타일은 영업이 아니라 창작이 우선이다. 광고주에게 의뢰받아 작품을 만드는 다른 광고·디자인회사와 달리 먼저 아이디어를 낸 뒤 그에 맞는 광고주를 찾는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도 그랬다. 지난해 5월 이 아이디어를 떠올린 ‘빅앤트’는 몇 개월간 아이디어를 ‘사줄’ 곳을 찾았고 한 반전 단체가 제작비를 보조하면서 세상에 나왔다.

박 대표의 꿈은 세계 곳곳에 ‘아이디어 특수부대’를 심어놓는 것이다. 한 곳에서 회사 규모를 늘리기보다 의욕이 불타는 젊은 창작자들로 도시마다 소규모 지사를 낸다는 설명이다. 아이디어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해 회사를 키운다는 계획이다.

주성원 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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