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맞바꾸기…파견직 전환…법안무산이 낳은 ‘기형규직’

  • 입력 2009년 7월 4일 02시 52분


3일 오전 비정규직법 개정을 요청하기 위해 국회 민주당대표실을 찾은 한승수 국무총리(오른쪽)와 정세균 대표가 서로 딴 곳을 쳐다보면서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정 대표와 한 총리는 이날 비정규직법의 시행에 따른 공기업의 비정규직 근로자 해고, 이영희 노동부 장관의 거취 문제 등을 놓고 견해차를 보이면서 설전을 벌였다. 연합뉴스
3일 오전 비정규직법 개정을 요청하기 위해 국회 민주당대표실을 찾은 한승수 국무총리(오른쪽)와 정세균 대표가 서로 딴 곳을 쳐다보면서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정 대표와 한 총리는 이날 비정규직법의 시행에 따른 공기업의 비정규직 근로자 해고, 이영희 노동부 장관의 거취 문제 등을 놓고 견해차를 보이면서 설전을 벌였다. 연합뉴스
■ 직원 대량해고 맞닥뜨린 기업들 ‘고육지책’

○부여 고려인삼창
“전원 무기계약 전환 부담”
비정규직 계약 일단 해지 뒤 용역회사 통해 재고용
○인천 남동공단 중기
“숙련공 놓치기 아까워”
이웃회사와 ‘근로자 딜’편법으로 같이 살기

비정규직 근로자의 고용기간을 최대 2년으로 제한하는 비정규직법 조항이 발효되자 ‘정규직 전환에 따른 부담’으로 근로자를 해고하거나 해고할 계획인 사업장이 속출하고 있다. 일부 기업은 비정규직을 일단 해고한 뒤 용역회사와 계약을 맺어 이들을 다시 파견근로 형식으로 받아들이거나 해고한 비정규직 근로자를 서로 맞바꾸는 ‘고육지책’으로 고용을 유지하고 있다. 이 모두 비정규직 기간 제한이 낳은 부작용들이다.

○ 해고 뒤 파견제로 끌어안아

3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 내리 한국인삼공사 고려인삼창. 이곳에는 생산직과 관리직 등을 포함해 860여 명이 근무한다. 이 회사는 전형적인 도농복합도시인 부여에서 가장 규모가 큰 데다 근로자의 봉급도 이 지역에서 높은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부여군 관계자는 “이 회사의 고용 환경은 부여의 지역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이런 고려인삼창에 최근 비정규직법의 회오리가 덮쳤다. 비정규직 직원이 557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생산직은 348명, 단순 노무직은 209명. 회사 측은 고민 끝에 일단 이들이 계속 회사를 다닐 수 있게 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생산직 근로자 348명은 무기계약 등의 방법으로 계속 회사에 남도록 했다.

문제는 단순 노무직 근로자. 이 회사가 이들을 끌어안기 위해 쓴 방법은 파견근로다. 일단 계약을 해지한 뒤 인력송출업체인 대전의 G사와 계약을 맺어 파견을 받아 일하는 형태. 모든 근로자를 무기계약으로 신분을 변경하면 복리후생비 등으로 회사의 지출이 너무 커지기 때문에 이 아이디어를 짜낸 것이다.

한국인삼공사 옥순종 홍보실장은 “모든 회사가 정규직이나 무기계약 등으로 근로자의 신분을 바꿔주고 싶지만 회사 지출이 너무 늘어나는 것이 고민”이라며 “같은 조직에서 일했던 사람들인 만큼 계속 같이 일하기 위해 일부는 파견근로 형태로 전환하는 절충점을 찾았다”고 말했다.

회사 측은 “G사와 인력 파견 계약을 할 때 근로자들의 보수를 그동안 받았던 수준으로 유지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파견근로 형식으로 근무하는 직원들은 아무래도 신분상의 불안감이 커지지 않을 수 없다. 일단 그들의 신분은 1일부로 고려인삼창 직원이 아니라 G사의 직원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단순 노무직 16명은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 측은 “해고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다른 일자리를 찾아 나간 것”이라고 말했다.

회사는 그동안 비정규직 근로자 문제의 해법을 찾느라 고민한 흔적이 역력했다. 이날 근로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오후 5시경 회사를 찾았으나 퇴근하기 위해 정문을 빠져나가는 근로자들은 한결같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나는 그런 거 잘 모른다”며 입을 닫았다. 한 사무직 직원은 “지금은 진정된 상태지만 한동안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됐다”며 “멀쩡히 일하던 사람을 자르고 편법을 써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비정규직법은 도대체 누굴 위한 것이냐”고 답답해했다.

○ 비정규직 맞바꾸기로 해법 찾기

“숙련공이 떠나면 생산라인은 곧바로 직격탄을 맞죠. 그래서 동종업체와 합의해 숙련공 2명씩을 서로 맞바꿔 채용하기로 했어요.”

인천 남동공단 내 일부 중소기업은 비정규직 숙련공을 계속 고용하기 위해 동종업종의 비정규직 근로자를 서로 맞바꿔 다시 고용하는 ‘딜(Deal)’을 추진하고 있다. 금속업체인 A사는 ‘비정규직 고용기간 2년 제한’이 발효된 1일 비정규직 근로자 3명 중 계약기간이 끝난 3명을 해고했다. 이 가운데 2년간 성실하게 일하며 금형기술을 터득해 나름대로 ‘베테랑’이 된 비정규직 직원 김모 씨(24) 등 2명은 계속 직원으로 쓰고 싶었지만 비정규직보호법에 따라 해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비정규직 근로자 3명을 둔 같은 업종의 남동공단 내 B사의 처지도 A사와 같았다. 동종업종 모임에서 서로 알게 된 이들 회사 대표는 같은 처지의 속사정을 털어놓다가 비정규직 계약이 끝난 A사의 김 씨 등 2명과 B사의 금속 금형을 담당하는 비정규직 근로자 2명을 서로 맞바꿔 다시 고용하기로 합의했다. A사의 관계자는 “금속 금형은 대표적인 3D 업종으로 늘 인력난을 겪고 있다”며 “숙련된 비정규직 근로자가 회사를 떠나면 생산차질이 발생해 비정규직을 이 같은 방법으로 다시 쓰게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남동공단을 비롯해 주안 5공단, 부평공단의 기계, 금형 업체 등은 일손 부족을 막기 위해 비정규직 근로자를 맞바꾸거나 잠시 해고했다가 파견근로자로 바꿔 다시 고용하는 방안 등을 찾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이날 서울 중구 장교동 서울지방노동청에서 대기업 15곳의 인사노무 관리자들과 만나 비정규직법을 바라보는 시각과 고충을 들었다. 이들은 업종과 회사 사정에 따라서 이해 정도가 서로 달랐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빨리 확정돼야 혼란을 막을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부여=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인천=차준호 기자 run-ju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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