核風에 날아간 ‘꽃제비 사랑’

  • 입력 2009년 7월 3일 03시 00분


2일 서울 송파구 신천동 안동대마방직 본사에서 김정태 회장이 착잡한 표정으로 특허 개발한 대마 원사를 살펴보고 있다. 김 회장은 평생 대마 관련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기술 개발에 매달렸다. 박영대 기자
2일 서울 송파구 신천동 안동대마방직 본사에서 김정태 회장이 착잡한 표정으로 특허 개발한 대마 원사를 살펴보고 있다. 김 회장은 평생 대마 관련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기술 개발에 매달렸다. 박영대 기자
지난해 10월 평양대마방직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김정태 회장(왼쪽). 김 회장은 이날 “서로 포용하는 마음으로 남과 북이 ‘윈윈(win-win)’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지난해 10월 평양대마방직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김정태 회장(왼쪽). 김 회장은 이날 “서로 포용하는 마음으로 남과 북이 ‘윈윈(win-win)’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평양진출 1호 南기업’ 안동대마방직 김정태 회장의 절규

지난해 10월 평양 동대원구 방직거리.

흰머리가 성성한 60대 노인이 깔끔한 정장차림으로 연단에 올라 300여 명의 군중 앞에 섰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조심스레 종이 한 장을 꺼낸 뒤 떨리는 목소리로 이를 읽어 내려갔다. “평양대마방직의 이번 준공식은 분단 60년사에서 남북 경제인들이 힘을 합쳐 이룩한 민족의 쾌거이며, 개성공단에 이은 또 하나의 커다란 성과입니다. (중략) 2008년 10월 30일 대한민국 15대 대통령 김대중 대독.” 이어 힘찬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자 노인의 뺨에는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그로부터 8개월이 지난 이달 1일 동아일보 기자 앞에 선 안동대마방직 김정태 회장(67)은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으로 겨우 입을 뗐다. “10년 동안 온 정성을 쏟았던 평양대마방직이 문을 닫게 생겼습니다….”

평양대마방직은 남한 기업이 최초로 북한 기업과 함께 평양에 세운 ‘1호 합영기업’이다. 김 회장은 대북 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중국과 경북 안동에 있던 공장까지 문을 닫았다. 하지만 남북관계 악화와 자금난으로 평양의 공장은 가동을 멈췄고, 남한에 유일하게 남겨둔 경기 성남시 의류공장은 최근 법원에 압류됐다. 약 180억 원을 들인 평양대마방직이 경영난을 겪으면서 남한 본사까지 파산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

김 회장은 한때 ‘삼베 팬티’를 처음 개발해 1999년 섬유업계 최고의 영예인 한국섬유대상을 수상하고, 대마 관련 제품 특허로 ISO9001 인증을 획득한 성공한 기업인이었다. 도대체 지난 10년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 “회장님처럼 기술 익히고 싶습네다”

김 회장에게 영욕을 안겨준 대북사업은 1998년 8월 우연히 중국 두만강변에서 탈북 청소년 ‘꽃제비’를 만나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중국 산둥(山東) 성 타이안(泰安) 시에서 섬유공장을 운영하던 김 회장은 두만강 근처에서 ‘부모가 굶어 죽어, 살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다’는 10대 탈북 소년과 마주쳤다. 소년은 온갖 세상 풍파에 시달려서인지 어린 나이에 이미 술과 담배에 찌들어 있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김 회장은 프란체스코수도회(작은형제회) 소속 신부들과 두만강을 넘어온 꽃제비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나섰다. 당시 북한에서 일가족이 1년간 사용할 수 있는 생활비와 사업 밑천인 리어카 구입비로 1인당 500달러를 주며 북에 있는 식구들에게 돌려보냈다. 이때 북한 국경으로 들어가던 한 꽃제비 소년이 건넨 말은 내내 김 회장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빌어먹지 않고 나도 회장님처럼 기술을 익혀서 회사를 차리고 싶습네다.”

김 회장은 고민 끝에 대북사업 진출을 결심했다. 비정부기구(NGO)의 식량지원에만 의존하지 않고 북한 동포들이 자립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주려면 현지에 기업을 세워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무작정 두만강변에 땅을 사 대마를 직접 재배하면서 북한을 오가는 조선족 사업가와 재일동포들을 찾아다녔다. 이들을 통해 당시 남북경협을 관장했던 민족경제협력위원회(민경협)와 군부, 보위부 등에 대마 종자와 사업계획서를 꾸준히 보냈다.

이렇게 3년을 공들인 뒤에야 2002년 12월 민경협 산하 새별총회사에서 사업 제의를 받았다. 2003년 11월 국내 최초로 평양 시내에 남북 합영회사를 설립하기로 합의하고 2006년 6월 완공을 목표로 공사에 들어갔다. 이때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하지만 상상하지도 못한 난관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한꺼번에 들이닥친 위기들

첫 번째 어려움은 2005년 6월 갑자기 찾아왔다. 북측이 예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공사를 중단시킨 것. 이듬해 12월까지 무려 1년 반 동안이나 공사가 전혀 진행되지 못했다. 그 사이 금융권에서 대출받은 이자비용은 꼬박꼬박 나갔고, 결국 김 회장은 공장 2개를 정리한 것도 모자라 남측 본사 인력까지 줄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야 격리된 개성공단과 달리 평양 시내 한복판에 남한 기업이 들어서면 주민들의 동요가 우려된다는 북한 강경파들의 주장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막상 공사가 재개된 다음에는 열악한 인프라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방직기계 다시 돌릴 날이 빨리 왔으면…”

2006년 양말공장이 시험생산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양말 제조기 50대 중 44대가 전력 문제로 한꺼번에 고장을 일으켰다. 보통 일반 기기는 60Hz의 전력 주파수에 맞춰 설계돼 있는데 북한은 전압과 전력 주파수가 불안정해 기계 작동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 때문에 김 회장은 발전설비를 새로 만드느라 20억 원을 추가로 들여야 했다.

이처럼 온갖 어려움을 딛고 지난해 10월 공장을 완공했지만 이번에는 북핵 실험과 개성공단 사태가 발목을 잡았다. 북측의 추가 억류 조치를 우려한 우리 정부가 개성공단 이외의 북한 내륙지역에 통행을 차단해 발이 묶인 것. 심각한 자금난으로 원자재마저 구입할 수 없게 되면서 현재 평양대마방직 공장은 설비만 들어선 채 가동이 중단됐다.

김 회장은 “10년간 꿈에서도 그린 공장을 세우고도 제품 생산을 하지 못하니 가슴만 타들어 간다”고 했다. 그는 금융비용 등으로 매달 1억 원가량의 적자만 떠안고 있다. 김 회장은 “평생 쌓은 방직기술로 여생을 북한 동포들에게 봉사하고 싶었다”며 “비록 회사는 좌초했지만 언젠가 북에 있는 방직시설이 다시 가동돼 못다 이룬 내 꿈이 반드시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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