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노동계-정부, 비정규직법 ‘폭탄 돌리기’

  • 입력 2009년 7월 2일 02시 59분


토공 148명-주공 31명 계약해지… 해고대란 비극 시작됐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 한나라-민주
손놓고 있다가 ‘호들갑’
유예기간 1년 2년 입씨름
숫자놀음하다 처리 무산
■ 노동계
“정규직 전환”에만 매몰
‘계약 해지자’ 사실상 외면
■ 노동부
입법형태 두고 갈팡질팡

《“비정규직법 개정 무산이라는 얘기를 듣고 눈물이 나왔습니다. 7월 15일이면 백조(실업자)가 됩니다. 회사는 법이 개정되면 같이 일할 수 있으니 다른 직장을 구하지 말라고 했는데 결국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어디서 직장을 구해야 할지…. 평생 백조가 될까 겁이 납니다.” 한 공기업의 비정규직 근로자 박모 씨가 1일 국회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다. 비정규직보호법 개정이 무산되면서 당장 1일부터 직장을 잃은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거리로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입만 열면 ‘민생’과 ‘서민’을 외치던 정치권은 벼랑 끝 협상에만 매달리며 법 개정을 외면했다. 18대 국회가 개원한 게 지난해 8월 26일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첫 원내대표였던 홍준표, 원혜영 의원은 올 5월 말 후임자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기까지 9개월 동안 비정규직법 대책 마련에는 등한시했다. 개정시한에 몰린 여야는 뒤늦게 지난달 1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3개 교섭단체 간사와 한국노총, 민주노총 대표가 참여하는 5인 연석회의를 구성했지만 결국 때늦은 호들갑으로 끝났다. 여야는 ‘유예 불가’(민주당)와 ‘3년 유예’(한나라당)로 맞서다 시간에 쫓기자 각각 ‘1년 유예’와 ‘2년 유예’로 태도를 바꿨다. 왜 1년, 또는 2년을 유예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리나 과학적 실증은 온데간데없이 서로 버티면서 ‘숫자놀음’만 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추가경정예산에 1185억 원의 정규직 전환지원금을 마련했지만 비정규직법 개정 때까지 집행을 미루는 바람에 법 개정이 안 된 지금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도 이 지원금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추미애 환경노동위원장은 노동계가 합의하지 않으면 절대 법안을 상정할 수 없다고 버티며 법안 상정의 책임을 5인 연석회의에 돌리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이강래 민주당 원내대표도 각각 ‘개정안 무조건 처리’와 ‘강행처리 물리적 저지’만을 외치는 데 급급했다.

노동계와 정부 또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양대 노총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만 매몰돼 ‘계약 해지자’ 문제를 사실상 외면한 것도 대량해고를 부른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사회적 약자 편에 선 노동계라면 정규직 전환도 중요하지만 월 3만여 명으로 추산되는 해고 예상자들에 대한 대책도 함께 논의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노동부의 섣부른 ‘100만 해고 대란’ 언급도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이영희 노동부 장관의 이 발언 이후 비정규직을 둘러싼 논란은 계약 해지자에 대한 대책보다는 해고 규모에 대한 숫자 공방으로 흘렀다. 노동부가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지난해 말부터 입법 형태를 정부제출→의원입법→정부제출로 바꾸면서 논의할 시간을 허비한 것도 정책의 신뢰성을 잃게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비정규직 문제를 풀어야 할 주체들이 책임을 방기하는 동안 한국토지공사는 지난달 30일자로 비정규직 근로자 148명에게 근로계약해지를 통보했다. 대한주택공사도 이날 31명을 해고하기로 했다. 주공의 비정규직 500여 명 중 300여 명은 올해 안에 계약기간 2년이 돌아와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는 1일 “이제라도 빨리 법을 고쳐 시행을 유예하고 유예기간 동안 ‘차별시정 관련 제도강화’ ‘비정규직을 위한 실업급여나 직업훈련 등의 사회안전망 강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훈 기자 taylor55@donga.com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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