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27>

  • 입력 2009년 7월 1일 14시 07분


"야, 이 새끼야! 지금 뭐하는 거야!"

흥분한 사람은 볼테르만이 아니었다. 서사라도, 노민선도, 꺽다리 세렝게티와 뚱보 보르헤스도 이성을 잃긴 마찬가지였다.

"저건 20세기 인간격투기에나 나올법한 공격이군."

뚱보 보르헤스가 한탄했다.

심판은 슈타이거와 그의 로봇제작팀에게 엄중경고를 주었다. 이빨에 드릴을 달아서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은 금지된 행동이었다. 게다가 목 윗부분인 '얼굴'은 공격을 철저하게 금했다. 얼굴 없는 휴머노이드 로봇의 격투 장면이 청소년이나 임산부들에게 유해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주심은 치명적인 반칙을 막지 못했다. 슈타이거가 글라슈트의 얼굴을 물어뜯을 때엔 손으로 몸을 감싸 심판들의 시야를 가렸다. 슈타이거의 교묘하게 계획된 행동이었다.

<보노보>에서 새로 도입한, 360도 전방향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만은 속이지 못했다. 미르코 크로캅은 편집된 화면을 여러 차례 보여주며 '슈타이거의 행동이 경기를 중단할 만큼의 명백한 반칙'이라고 성토했다. 그러나 반칙으로 승패를 가리기엔 경기장의 열기가 지나치게 뜨거웠다.

슈타이거와 글라슈트는 스탠딩 포인트로 돌아와서 다시 경기를 시작했다. 슈타이거가 글라슈트에게 다가가 파워 잽을 날리고 빠졌다. 글라슈트는 피하지 못했다. 슈타이거가 왼쪽으로 돌면서 왼쪽 다리에 여러 차례 니킥을 가했다. 이번에도 글라슈트는 맞기만 했다.

"얼굴이 너무 흉측해!"

니킥을 맞고 몸을 떨 때마다, 왼쪽 옆얼굴의 일부만을 간신히 가린 금속외피가 너덜거렸다.

"글라슈트, 공간을 확보해! 니킥을 피해야지!"

꺽다리 세렝게티가 소리쳤다. 민선이 심각한 표정으로 볼테르에게 따지듯 물었다.

"글라슈트가 이상하지 않아요? 충분히 시뮬레이션을 했는데도 방어 자체를 포기한 것처럼 굴어요. 왜 저러죠?"

사라가 민선을 뒤이어 물었다.

"글라슈트의 얼굴 방향이 슈타이거를 10도 이상 빗겨가요. 앞을 똑바로 못 보는 것 같은데요?"

볼테르는 즉답을 피한 채 글라슈트의 흉측한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글라슈트는 계속 비틀거리면서 슈타이거에게 다가갔고, 슈타이거는 계속 뒤로 빠지면서 파워 펀치와 잽을 날렸다. 글라슈트는 맞을 것을 알면서도 슈타이거를 향해 계속 다가갔다. 걸음은 매우 느렸다.

"어, 왼쪽 얼굴 금속외피를 휘어서 글라슈트 왼쪽 눈에 박았네. 카메라를 완전히 박살내 놓았다고!"

"저 너덜거리는 금속외피를 잘 봐. 덜 떨어진 게 아니라 일부러 박은 거잖아! 왼쪽 카메라 가 망가졌다면, 오른쪽 카메라만으론 3차원을 인식할 수 없어"

"나쁜 새끼들!"

글라슈트는 한쪽 눈이 보이질 않았다. 거리감이 떨어져 슈타이거가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슈타이거는 공격하고 빠지는 전법을 계속 썼다.

"저 멍청이, 맞으면서도 계속 가네! 한심한!"

마틴 구레츠키가 처음 입을 뗐다. 상대편이 보기에도 글라슈트의 행동은 답답한 모양이다.

글라슈트 주변을 계속 돌던 슈타이거가 마지막 돌려차기 일격을 가하기 위해 글라슈트에게 다가갔다. 글라슈트는 주먹을 뻗지도 못한 채 비틀거렸다. 누가 보더라도 슈타이거의 완승으로 끝나는 분위기였다.

그때 갑자기 글라슈트가 두 무릎을 털썩 꿇은 후 앞으로 쓰러지면서 슈타이거의 두 발목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힘껏 팔을 당긴 후 슈타이거의 가슴 위로 올라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일어나. 당장!"

구레츠키의 외침보다 글라슈트의 주먹이 더 빨랐다.

글라슈트는 미친 듯이 슈타이거의 가슴과 목, 그리고 얼굴을 주먹으로 연속 가격했다. 파워 펀치를 일곱 개 계속 맞은 슈타이거의 오른쪽 목이 꺾였다. 슈타이거가 몸부림을 쳤지만 글라슈트의 주먹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 역전이었다.

40초 가까이 파워 펀치를 맞은 슈타이거의 가슴에서 '데스 시그널'이 나왔다. 4강전의 승리 로봇은 글라슈트였다.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그런데 데스 시그널이 나온 후에도 글라슈트는 연속 가격을 멈추지 않았다. 마틴 구레츠키와 볼테르가 거의 동시에 뛰쳐나와 말렸지만 글라슈트는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슈타이거의 머리가 뜯겨 나갔고 글라슈트는 벌떡 일어나서 슈타이거의 머리 없는 몸통을 벽으로 던졌다.

기계이상이라고 직감한 볼테르가 글라슈트의 파워를 껐다.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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