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작금의 한국 현실은 어떤가. 7월 1일 효력을 발휘하는 비정규직법 개정을 놓고 국회에서 갑론을박을 벌이다가 유야무야되어 버렸다. 비정규직법 유예 주장도 근본적 제도 설계보다는 이후 벌어질지도 모를 비정규직 해고사태의 정치적 직격탄을 피하려는 정치인들의 면피용 성격이 강하다. 한나라당은 노동단체의 집중 포화를 우려해 의원입법을 기피하며 노동계와의 정치적 관계 설정에 몰두해 왔다. 민주당 의원들도 대안 제시보다는 노동계와의 정치적 관계를 고려하면서 한편으로는 5자회담 합의가 중요하다며 결정을 미루어 왔다.
2년전 비정규직법 잘못 반복
그간의 논의과정을 보면 한나라당은 2년 유예, 민주당은 6개월 유예를 주장하다가 마감 날짜가 다가오자 양당은 여러 형태로 절충안을 바꾸었다. 그러나 왜 그 기간만큼 유예해야 하는지, 유예기간 종료 뒤에는 백지 상태에서 다시 논의를 하자는 것인지, 정부안대로 4년 연장을 하자는 것인지, 유예기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 설명 없이 수정에 재수정을 거듭해 2년 전 현재의 비정규직법이 만들어질 때 정치교환에 의해 기간을 설정한 잘못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청와대도 법 개정의 원칙을 천명하고 당정청 조율을 통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정부는 재입법이 어려운 원인을 국회와 노사관계 탓으로 돌리지만 국민은 정부-청와대-한나라당을 하나의 MB 정부로 본다. 언제까지 무기력에 빠져, 그리고 당정청의 조율기제 약화를 탓하며 국민더러 참아달라고 할 것인가. 어차피 유예되어도 MB 정부 집권 기간에 비정규직 3차 정쟁은 피할 수 없다.
TV 토론이나 언론매체를 보아도 그 나물에 그 밥처럼 비슷한 정치논리와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갑론을박하는 풍경뿐이다. 비정규직 콜로세움에서 지식 검투사들이 결론 없이 파편조각 같은 논리로 다투는 모습에 국민은 식상해하고 있다. 전문가들도 친자본, 친노동으로 나뉘어 비정규직 입법효과 분석 결과를 이데올로기 취향에 맞추어 견강부회(牽强附會)로 해석하거나 숫자의 함정에 빠져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이어 다가올 복수노조 허용 및 노조전임자 급여 지급 금지의 시행 문제에 대한 논의도 공익에 대한 고려나 과학적 논리는 무시된 채 ‘정치적 교환(딜)’ 방식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복수노조 및 전임자 제도가 13년간 유예되어온 것과 같은 ‘유예 대하사극’이 비정규직 문제에서 벌어지지 않을지 걱정스럽다. 합리적 대안을 가지고 공익에 부합되는 안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보다 남의 논리를 비판하며 시간을 끌다가 막판에 이르러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핑계를 대는 모습을 우리는 지금까지 보아왔다.
정책 관계자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차원이 아니라 유예가 자신들의 중요한 공적(功績)인 것처럼 여기는 현상도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위한 노동기준의 선진화, 복수 노조제도의 글로벌 스탠더드화, 전임자 임금 지급 관행의 합리적 개선 등 노동 현안에 대해 공선사후(公先私後)의 자세로 타협안을 모색하기보다는 내 주장, 네 주장이 낡아빠진 축음기를 통해 13년째 반복해서 흘러나오는데 비정규직법 유예 논란이라는 새 노래가 또 다른 축음기에서 틀어지고 있는 것이다.
후손위해 공익적 대안 마련을
비정규직 해고 카운트다운은 시작되고 말았다. 하지만 복잡한 문제일수록 원칙이 분명하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비정규직 문제는 글로벌 스탠더드, 사적 계약 중시 그리고 노동계약의 다양화라는 큰 원칙에서 풀어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입법을 다루는 주체들이 미래 한국, 후손들을 위해 합리적 대안을 마련한다는 공익적 사고를 가져야 한다. 현재같이 정치, 이데올로기 그리고 사익(私益)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국 노동의 현주소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조준모 객원논설위원·성균관대 교수·경제학 trustcho@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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