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게 밴 書香… 헌책방의 추억 다시 한번

  • 입력 2009년 7월 1일 02시 57분


■ 전국 헌책방거리는 변신중
인천 배다리-부산 보수동 등
시낭송회-고서전시회 개최
문화체험행사 활발

6월 27일 오후 2시 인천 동구 금곡동 아벨전시관 2층 시(詩)다락방. 20평 남짓한 공간에 중년 남성부터 대학생 수녀 시인 등 30여 명이 함께 자리했다. ‘배다리 시낭송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매달 넷째 주 토요일 시인 한 명을 초대해 시를 읽는 이 모임은 이번이 20회다.

“누구든 내 앞에서는/뼈를 세우지 말라/목에 힘주지 말라/흐름에 맡기고/송장헤엄을 쳐라”(최종천의 ‘소용돌이’ 중에서)

‘소용돌이’를 낭송한 이충하 씨(66)는 낭송회 참석이 처음이다.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다 얼마 전 은퇴했다는 이 씨는 “그동안 삶이 바빠 시를 잊고 지냈다”며 “일을 관두고 나니 다시 시를 읽고 싶어 이곳을 찾았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는 오후 4시를 훌쩍 넘겨 마무리됐다. 무더운 날씨에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흐를 정도였지만 일찍 자리를 뜨는 사람은 없었다. 시낭송회는 인천의 헌책방거리인 배다리거리에 있는 아벨서점이 주최한 행사다. 이 서점의 곽현숙 대표(59)는 “시와 책 속에 사람들 마음속 시를 일깨우는 힘이 있다는 생각으로 낭송회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서점을 찾은 최은영 씨(27)는 20년 단골이다. 최 씨는 “새책 서점은 베스트셀러다, 추천도서다 하며 어떤 책을 보라고 강요한다는 기분이 들지만 이곳에 오면 스스로 필요한 책을 발견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아벨서점 간판 밑에는 곽 씨가 직접 정한 ‘살아있는 글들이 살아있는 가슴에’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곽 대표는 이곳에서 30여 년째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헌책방을 알리겠다는 취지로 2005년부터 2년에 걸쳐 직접 못질을 해가며 서점 인근에 아벨전시관을 만들었다.

1970, 80년대 50여 곳이 넘는 헌책방이 생기며 전성기를 누리던 배다리거리는 1990년대 새책 공급량이 급증하고 책 대여점이 생기면서 타격을 입었다. 현재 남아있는 헌책방은 6곳이다. 2005년경부터는 배다리거리를 없애는 재개발 논의도 있었으나 이듬해 ‘배다리를 가꾸는 인천시민모임’이 생기면서 배다리거리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2008년부터 매년 5월 ‘배다리 문화축전’이 열려 영화제와 공연, 헌책 손질 체험, 헌책 벼룩시장 등 여러 행사가 열리고 있다. 매달 열리는 인문학 강좌와 시낭송회도 그 일환이다.

문학평론가 최원식 인하대 국문과 교수는 아벨서점 단골로 중학교 때부터 인천 배다리거리의 헌책방을 다녔다. 최 교수는 “최근 들어 젊은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고서를 수집하고 헌책방을 다니는 걸 많이 보는데 아무래도 현대사회에서 인간적 접촉이 희박해지다 보니 사람냄새 나는 헌책방이 각광받기 시작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인천 배다리거리 외에도 전국의 헌책방거리는 대전 동구 원동, 충북 청주시 상당구 중앙시장, 전북 전주시 완산구 동문거리, 대구 중구 남문시장 등에 있다. 이 중 부산 중구 보수동 책방골목은 50여 곳이 자리 잡은 국내 최대 규모의 헌책방거리다. 1950년대 인근 미군부대에서 나온 잡지와 영어만화 등을 팔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70곳이 넘는 헌책방이 영업을 하며 전성기를 누리다 1980년대 후반 재개발로 20여 곳이 사라졌다.

보수동 책방골목 번영회의 양수성 총무는 “우리나라 헌책방 골목은 영국의 ‘헤이온와이’, 일본의 ‘간다’ 못지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며 “헌책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문화 행사 등을 펼친다”고 말했다. 번영회의 주도 아래 2004년부터 매년 9월 시낭송회, 고서전시회, 설치미술, 책방주인장 경험하기 등 행사를 펼치고 있다. 올해 초에는 가게 셔터에 그래피티를 그려 넣어 책방골목이 문을 닫을 때면 거리가 미술관으로 변신하도록 만들었다. 보도블록과 가로등도 교체해 좀 더 현대적이고 깔끔한 곳으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인천=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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