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의관 갖춘뒤 세 그릇 사약 의연하게 받아

  • 입력 2009년 4월 27일 02시 58분


조선 유학자들의 임종기록

오용원 교수 ‘考終일기’ 분석

“서리(書吏)가 선생에게 ‘임금께서 약을 내리셨습니다. 약을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했다. (제자) 이후진이 서리에게 ‘대감의 병환이 위중해 들을 수가 없으니 가까이 다가가서 크게 말씀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서리가 조금 앞으로 다가가 귀에 대고 다시 고하니, 선생이 곧바로 몸을 움직여 일어나 앉아 상의를 가져오게 하셨다. 직령(直領·두루마기)을 찾아 가져다 드리니 선생이 팔을 들면서 입히라고 명하셨다.”

1689년 6월 8일 유배지인 제주에서 한양으로 압송 도중 초산(楚山·현 정읍)에서 사약을 받은 우암 송시열(1607∼1689·사진)의 임종 순간을 담은 고종일기(考終日記) ‘초산일기’의 한 대목이다. 제자 민진강이 기록한 초산일기는 병으로 옷 입을 기력조차 없었지만 몸을 굽혀 사약을 내린 임금의 전지(傳旨)를 받들고 사약 세 보시기(그릇)를 마시며 의연함을 보인 우암의 마지막 순간을 보여준다.

오용원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인문한국(HK) 교수가 25일 대동한문학회(회장 황위주) 춘계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고종일기와 죽음을 맞는 한 선비의 일상’은 죽음을 앞둔 고종자(考終者·대부분 대학자)의 일상과 임종, 상장례를 담은 고종일기를 분석한 첫 논문이다. 고종일기는 남아 있는 자료가 드문 데다 학계의 대학자 연구가 저술과 업적 중심인 상황에서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논문은 우암 외에 ‘소퇴계(小退溪)’로 불리는 대산 이상정(1711∼1781)의 고종일기인 ‘고종시일기(考終時日記)’도 소개한다. 대산이 병석에 누운 1781년 10월 16일부터 세상을 떠난 12월 9일, 이후 상장례가 진행된 같은 달 12일까지의 기록이다. 죽음을 감지한 대산은 제자에게 일상을 자세하게 기록할 것을 종용했다고 한다.

대산의 고종일기에는 후학 얘기가 많다. 그는 25세에 과거에 급제해 잠시 벼슬을 한 뒤 평생 경북 안동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혈변이 심해져 거동조차 어려워지기 전까지는 문도들이 찾아오면 의관을 정제하고 공부 방법과 읽어야 할 책을 알려줬다. 정종(正終·바른 끝맺음)을 실천하려는 의지도 두드러졌다. 침실에 대소변 용기를 설치할 수밖에 없게 되자 그는 서가에 있는 책들을 베로 가리게 했다. “대부분 성현(聖賢)의 유훈인데 어찌 함부로 가볍게 여길 수 있겠느냐”는 이유였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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