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企 노사 ‘상생의 미덕’

  • 입력 2008년 7월 23일 02시 57분


“더 못줘서 미안” “위기땐 뭉쳐야죠”

《노루페인트 노조는 4월 말 올해 임금인상 여부를 회사에 일임했다. 페인트의 원료가 되는 석유화학 제품 가격이 급등하면서 ‘회사부터 살리기 위해’ 취한 선택이었다.

3개월쯤 지난 21일 양정모 노루페인트 사장은 전 임직원에게 e메일을 보내 “올해 임금을 기본급 기준으로 4% 올릴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 인상률보다 1%포인트 낮은 것. 6월 물가상승률보다도 1.5%포인트 낮은 ‘실질소득 마이너스’ 수준이다. 하지만 노조는 “올해는 동결을 각오했는데 임금이 인상돼 고맙다”는 뜻을 사측에 전달했다. 박연수 노루페인트 노조 부위원장은 “상반기 실적이 나오면 최대한 배려하겠다던 회사가 약속을 지켰다”고 말했다.》

“물가보다 임금인상률 낮을 것” 32%

일부노조 사측 일임 ‘고통분담’ 합류

“원자재가 급등은 생존 문제” 공감대

■ 중기 285곳 동향 조사

동아일보 취재진은 중소기업중앙회에 ‘올해 중소기업의 임금협상 동향’을 조사해 볼 것을 제안했다. 조사는 이달 10∼16일 중소기업 285곳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그 결과 응답 업체 중 46.6%는 지난해와 임금인상 폭이 비슷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지난해보다 임금인상 폭이 줄어들 것이라는 응답은 34.8%였으며 인상 폭이 커질 것이라는 응답은 18.6%였다. 10곳 중 8곳은 올해 임금인상 폭이 지난해와 비슷하거나 지난해보다 낮을 것으로 보고 있는 것.

조사대상 업체 중 물가상승률보다 임금상승률이 높을 것이라는 응답은 11.3%에 그쳤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6월 물가상승률이 5.5%로 지난해(2.5%)의 두 배 이상인 것을 감안하면 중소기업 노사가 악화된 경영환경을 고려해 임금인상을 자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에 이어 중소기업에서도 임금인상 자제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이다.

노동부의 조사에서도 6월 말까지 300인 미만 사업장의 임금교섭 타결률은 27%로 지난해 같은 기간 23.4%보다 높았다. 물가 상승세에도 불구하고 임금인상률(임금총액 기준)은 5.4%로 지난해 5.5%보다 약간 줄었다.

○ “단순한 악재 아닌 생존위기” 공감 확산

이 같은 움직임은 최근 원자재가 급등이 단순한 악재(惡材)가 아닌, 회사의 생존이 달린 위기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 노동조합을 설립하면서 극심한 ‘노노 갈등’을 겪었던 강원 홍천군의 성산택시는 지난달 9일 ‘노사화합 선언문’을 채택했다.

성산택시 관계자는 “택시 업계 전체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이런 때일수록 노사가 화합해 고객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선언문을 채택했다”고 밝혔다.

노조의 임금인상 자제 움직임에 대해 고통 분담 및 경쟁력 강화 노력으로 화답하는 중소기업도 늘고 있다. 경남 창원시의 금속탱크 및 저장용기 제조업체인 세원셀론텍은 5월 중순 기본급을 지난해 수준으로 인상하는 선에서 무교섭으로 임금협상을 타결했다.

그 대신 회사 측은 노조의 고통 분담 노력을 보상하고 회사의 경쟁력을 높인다는 의미에서 △우수 사원 해외 시찰 기회 부여 △여름휴가 4일에서 5일로 확대 △20년 이상 근속자에게 부부 동반 동남아 여행권 증정 등을 발표했다.

○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 계기 돼야

전문가들은 고유가 등으로 국가 전체에 위기가 닥친 만큼 각 경제주체가 고통 분담에 힘을 모아 오일쇼크를 극복한 해외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1973년 영국 노동당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1차 오일쇼크로 물가가 크게 오르자 영국 노동당은 7년 동안의 임금동결 조치를 풀었다. 그러자 임금-물가 악순환이 나타나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을 맞았고,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에 금융지원을 요청했다.

3년 뒤 취임한 마거릿 대처 총리는 △대형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공공부문의 지출을 줄이며 △노조 활동을 제한하는 등 강력한 경제개혁안을 추진했다. 정부 기업 노동자 모두 위기상황이라는 공감대를 갖고 고통 분담에 동참하면서 영국은 1982년 IMF의 지원금을 모두 상환했다.

조봉현 기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인한 고통이 기업의 체질을 개선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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