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미경]巨富<거부>의 비듬과 픽업트럭

  • 입력 2007년 8월 31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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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월 미국 출장길에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에 들렀다. 중소 도시 오마하는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의 고향이자 그가 소유한 금융회사 버크셔 해서웨이의 본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버핏 회장이 살고 있다는 집 앞에 가 봤다. 궁전 같은 초호화 저택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베벌리힐스풍 고급 빌라를 기대했던 기자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조그만 앞뜰을 가진 중산층 주택이었다. 군데군데 페인트칠까지 벗겨진 것이 사실 평균 이하였다. 차고에는 10년은 된 듯한 고물 픽업트럭이 서 있었다. 그는 요즘도 그 트럭을 몰고 다닌다고 한다.

#1997년 서울 한 호텔의 기자회견장. 이날의 주인공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었다. 북새통을 이룬 회견장에서 이리저리 밀리던 기자는 운(?)좋게도 게이츠 회장의 바로 뒤에 서게 됐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양복 어깨 위에 떨어진 비듬이었다. ‘비서가 비듬도 안 털어 주나’ 하는 의문이 머리를 스쳤지만 이내 깨달았다. 오늘 비듬을 털어 내도 그는 내일 또다시 비듬 섞인 헝클어진 머리로 나타날 사람이라는 것을.

#사진 속에서 그들은 웃고 있었다. 버핏 회장이 빌&멀린다 게이츠 자선재단에 37조 원을 기부하는 장면이었다. 게이츠 회장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모습이었고 버핏 회장 역시 유행이 두 번은 지났을 듯한 두꺼운 뿔테 안경 차림 그대로였다. 세계 1, 2위 부자의 소박하고 수수한 모습이었기에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기대)’의 감동은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어느 사회건 부자는 부러움과 질시를 동시에 받게 마련이다. 올해 초 게이츠 회장과 버핏 회장은 한 모임에서 부(富)를 ‘선물’이자 ‘장애물’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부를 쌓을수록 사회의 도덕적 기대도 높아진다”면서 “그 기대에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을 둘러봐야 하는 것이 부를 쌓는 것만큼 힘들다”고 털어놨다.

부자에 대한 이중적 기준은 한국 사회에도 적용된다. 부자 되는 비법을 가르쳐 주는 책들이 베스트셀러 상위 목록을 장식하고 있지만 올해 ‘부자를 존경하지 않는다’는 사람은 61.9%로 지난해 57.7%보다 늘어난 것으로 최근 한 여론조사 결과 나타났다. 부자의 도덕적 책임을 중시하는 의견도 늘어나고 있다.

지금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만큼 ‘부자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는 부가 만들어 낸 ‘양날의 칼’ 위에 서 있다. 보통 직장인들이 꿈꾸기 힘든 부를 이룬 노하우를 내세워 ‘경제 대통령’에 도전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부로 인해 길고 긴 검증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 그는 상대 진영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공세에 변변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유권자들의 의심도 잠재우지 못했다.

미국 갑부이자 자선가였던 앤드루 카네기는 일찍이 “부자가 되는 것만큼 힘든 것은 돈을 벌고 쓰는 것에 대한 철학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국민은 이 후보의 부를 늘리는 능력과 기술은 인정한다. 이제 그들은 그가 어떤 ‘부자관(觀)’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그가 가진 부의 철학을 보여 줘야 할 때다.

정미경 교육생활부 차장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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