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랍자 가족이 겪은 시련의 41일

  • 입력 2007년 8월 28일 22시 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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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일간의 인질극'.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던 피랍자들 만큼 가족들도 가슴을 저미는 아픔속에 구명을 위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살얼음판을 걷듯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하루 하루를 보냈지만, 가족들은 수차례에 걸친 통첩시한 연장과 피살, 육성·동영상 공개 등 탈레반의 옥죄기식 전략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억류된 아내, 자식에게 보내는 자필편지와 국제사회의 도움을 요청하는 UCC(사용자 제작 콘텐츠)에 담긴 애끓는 가족애는 눈물겹다는 말로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故 배형규·심성민 씨의 고귀한 희생과 유족들의 격려는 가족들에게 희망의 끈을 결코 놓지 말라는 격려의 채찍이었다.

◇피랍 비보, 살해위협 통첩… 가족모임 구성해 대처

배형규(42) 목사 등 샘물교회 봉사단 23명이 아프간 무장세력 탈레반에게 납치(7월 19일)된 사실이 확인된 때는 지난달 20일.

차성민(30) 씨를 대표로 가족모임을 꾸리고 안정을 찾을 쯤 탈레반은 '한국군이 즉각 철수치 않을 경우 21일 오후 4시30분 인질을 살해하겠다'는 통첩을 보내왔고, 이때부터 가족들의 숨가쁜 시련은 시작됐다.

협상시한이 다가오자 가족들은 21일 오후 '즉각 철군'을 요구하며 외교부를 항의방문하는 등 정부측와 마찰을 빚기도 했지만, 통첩시한이 22일 오후 11시30분으로 연장되자 한숨을 돌리며 석방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다.

22일과 23일 탈레반의 통첩과 시한연장이 이어지면서 평정심을 되찾은 가족들은 선교가 아닌 봉사활동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언론보도에 대응하고 정부측과의 협조 속에 사태추이를 냉정히 지켜봤다.

가족들은 특히 아랍권 대표방송인 알자지라와의 인터뷰를 통해 가족들의 심경을 알리고 무사생환을 호소하며 협상의 측면지원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잇단 피살과 육성·동영상 공개에 의연함 유지

피랍 7일째인 25일밤 봉사단을 인솔한 배 목사가 피살됐고 닷새 뒤(30일)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을 배 목사의 시신을 도로변에 버린 탈레반의 잔혹성에 치를 떨었고 한때 극도의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설마했던 희생에 가족들은 잠시 실의에 차 있었지만 배 목사의 유족들은 나머지 피랍자 22명의 석방 때까지 장례를 미루겠다며 가족들에게 용기를 심어줬다.

27일 아프간 현지 인솔자 임현주(32·여)씨를 시작으로 국내외 언론을 통해 유정화(39·여), 김지나(32·여), 심성민(29). 이지영(37·여) 씨 등의 구명을 요청하는 인터뷰 내용이 잇따라 나오고 12명의 동영상까지 알자지라방송을 통해 보도됐지만 가족들은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탈레반의 얕은 심리전에 휘말리지 않고 의연히 대처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러나 협상시한이 계속 연장되던 30일 새벽, 심성민(29) 씨의 두번째 희생이 알려졌고 가족들은 다시 한번 동요했다.

가족들은 그러나 샘물교회 인근 분당서울대병원에 심 씨의 빈소가 차려지고 영결식이 치러지는 사흘동안에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배 목사와 심성민 씨 유족 모두 시신기증을 결정해 일부 비판여론도 잠잠해졌다.

◇눈물의 편지, UCC 공개… 국제사회에 호소

피랍 11일째인 29일, 납치된 제창희(38) 씨의 어머니가 '지혜롭게 행동하고 침착하게 이겨서 무사히 돌아오라'는 내용의 자필편지를 공개, 무사석방을 언론에 호소했다.

8월 1일에는 김윤영(35·여)씨의 남편 류행식(36) 씨가, 5일에는 서명화(29·여)·경석(27) 씨의 부모인 서정배(57) 이현자(54·여) 씨가 눈물의 편지를 썼다.

류 씨는 이어 6일 미국 UCC 전문 사이트인 유튜브(http://www.youtube.com/)에 `To my dearest wife in Afganistan'이라는 제목으로 만든 동영상을 올렸다.

류 씨는 "여보 많이 덥고 힘들지?. 당신은 너무 아파할텐데, 너무 힘들어 할텐데 내가 먹고 있는 것도, 자고 있는 것도 이렇게 내 자신이 싫고 미울 수 없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네티즌에게 호소했고, 다른 가족들의 UCC도 연이어 올려졌다.

"여보 사랑해. 정말 사랑해". 애타는 사부곡(思婦曲)의 맺음말은 UCC를 통해 해외에도 전해졌다.

협상의 직·간접 키를 쥐고 있는 미국과 이란 대사관 등을 찾고 아프간 직접 방문을 추진하는 등 치열한 가족들의 구명 행보는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고대하던 첫 석방… 사태해결 물꼬 터

탈레반이 제시한 마지막 협상시한이었던 지난 2일 오후 4시30분 이후 추가로 시한을 설정되지 않고 인질 살해 위협도 없는 소강상태가 한동안 이어졌다.

피랍 26일째인 13일밤 김경자, 김지나 씨 등 여성인질 2명이 첫 석방됐다.

두 김 씨의 가족들은 석방의 기쁨을 애써 감춘 채 나머지 가족들에게 미안함을 표시하며 피랍사태가 현재진행형임을 일깨웠다.

국군수도병원에 입원해 특별보호를 받던 두 김 씨는 환자복을 입은 채 알자지라 방송과 인터뷰를 갖고 나머지 인질의 조속한 석방을 기원하기도 했다.

현지 인솔자인 이지영 씨는 석방을 양보한 것으로 알려지고, '건강히 잘 있다.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의 부모님께 보내는 짧은 편지가 공개돼 감동을 자아냈다.

◇나머지 19명 전원석방

첫 석방 후에도 가족들은 이슬람 라마단 의식후 행운의 상징으로 뿌려진다는 붉은장미 19송이(나머지 인질 19명을 상징)를 방문하는 대사관마다 전달하는 등 구명노력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붉은 장미는 '라마단' 금식월(禁食月)이 시작되는 9월 중순까지는 일괄석방 등 좋은 소식이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담았다.

2명의 우선 석방 후 보름째인 28일 밤 마침내 19명 전원석방이라는 낭보가 전해졌다. 41일간의 보이지 않는 혈투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살해되면 그 가족이 떠나고 결국 단 한 명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비유했던 가족모임 사무실로부터 이제 가족들은 피랍자들처럼 '무사귀환'하게 됐다.

디지털뉴스팀·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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