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제2장 청일전쟁과 대만할양(하)

  • 입력 2007년 8월 28일 14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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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함이 감도는 바다

청일 전쟁(중국에서는 갑오 중일 전쟁)으로 일본과 중국은 어떤 싸움을 펼쳤는가. 그 결과는 중국과 대만에게 무엇을 가져 왔는가. 그 대답을 찾아서, 일본군이 일찍이 쳐들어 간 중국과 대만의 두 개의 해변을 방문했다.



두 개의 해변

1895년에 일본군이 상륙한 대만 동북부의 아우디(澳底) 해변이다. 유리로 된 설명 판에는 상륙 시 사진의 설명이 새겨져 있었다. 해변으로 상륙해 오는 일본군의 망령을 보는 듯하다=이소가와(五十川) 촬영

복원된 ‘딩위안(定遠)’=산둥성 웨이하이시(威海市)에서, 고미야지 마사루(小宮路勝) 촬영

조용한 바다가 여름 햇살에 빛난다.

황해에 돌출한 산둥(山東) 반도의 끝에 위치한 웨이하이시(威海市). 선창과 만 안의 작은 섬들, 류공다우(劉公島) 사이를 많은 관광객을 태운 페리가 왕래한다.

웨이하이웨이(威海衛)로 불리던 19 세기, 이곳에는 청의 북동부 바다를 지키는 북양 함대의 기지가 있었다. 바다를 둘러싸고 포대가 만들어 지고, 류공다우(劉公島)에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1880년대까지는 동양 제1의 함대라고 불렸지만, 청일 전쟁에서 패배한다. 일본 함대가 이 바다를 내습하여, 북양 함대는 투항했다.

페리 선창으로부터 몇 분 걸었다. 선창에 낡은 군함이 보였다. 북양 함대의 기함이었던 전함 ‘딩위안(定遠)’이다. 실물과 거의 같은 형태와 규모로 만들어져 길이는 91미터이다. 2005년 4월에 선을 보였다. 군함 내에 역사 자료를 전시하고 있었다.

이 배를 소유하는 웨이하이 북양수상 웨이하이발전유한공사(威海 北洋水師旅遊発展 有限公司)의 짱페이치(姜培旗) 사장을 만났다. “중일 관계에 영향을 줄 생각은 없습니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목적입니다”라고 말했다. 2년 간, 약 60만 명이 방문해 관광 진흥에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대만의 역사

남태평양 계 등의 민족이 옛날부터 정착해 살았다. 17세기가 되면서 네들란드가 남부를, 스페인이 북부에 거점을 구축했다. 네들란드가 스페인을 격퇴하고 지배하였으나, 명나라 왕조의 재건을 목표로 삼은 쩡청공(鄭成攻)이 네들란드 세력을 축출하여, 쩡씨 일족의 통치로 넘어갔다.

이를 청이 쓰러뜨리고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이 시기부터 대만 건너편 해안인 복건성(福建省)을 중심으로 대륙으로부터의 이민이 급증했다. 청일 전쟁으로 일본이 대만 서방의 펑후(澎湖)섬을 점령하였다. 1895년의 시모노세키(下関) 조약으로 일본으로의 대만 펑후섬의 할양이 결정되면서, 반세기에 이르는 식민지 시대가 시작된다.

제2차 대전의 패전으로 일본이 철퇴한 후, 국민당이 이끄는 중화민국정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잇달아 대륙에서 건너 온 사람들(외성인)과 원래의 주민(본성인) 사이에 골이 깊어져, 1947년 2월 28일부터 계속된 정권과 주민의 충돌(2ㆍ28사건)로, 다수의 주민이 희생되고, 균열은 결정적이 되었다. 49년, 대륙이 내전 끝에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중화민국정부는 타이베이(台北)로 수도를 옮기고, 수백만 명이 대만으로 피했다. 국민당정권이 계속 되지만, 80년대부터 서서히 민주화가 진행되어, 96년에는 총통 직선제를 도입하고, 2000년, 본성인의 지지가 높은 민진 당이 정권을 잡았다.

서로 경계하는 일본과 청 / 겨루어 해군을 증강

딩위안(定遠)은 일본에 있어서, 복잡한 사연이 있는 배다. 1886년에 다른 함선과 함께 나가사키(長崎)에 기항했다. 그 때, 수병들이 거리에서 소란을 피워, 경찰과의 대난투가 벌어져 쌍방에 사망자가 나왔다. 일본 측은 청나라 함대의 위용을 보게 되는 한편, 수병들의 행동에 ‘국가의 치욕이다’라는 반발도 나와, 해군 증강에 박차를 가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먼저 청나라 정부에 경계심을 갖게 한 것은 일본이었다. 12년 전, 일본의 대만 출병을 경험한 청나라 정부는 해군 증강에 거액을 쏟아 부었다. 일본과 청은, 군비 확장 경쟁에 여념이 없었다.

딩위안(定遠)의 내부를 안내해 준 공사의 연구자에 의하면, 전쟁 당시에는 일본 해군이 우위에 있었다. “일본 배는 대포의 수가 많은데다가, 발사 속도도 좋았다”라고 말한다. 한편, 북양 함대의 증강은 1880년대 말경부터 멈추어 있었다.

왜, 청은 증강을 멈추었는가.

현지 전문가들의 저서 『북양 함대와 류공다우(北洋海軍と劉公島)』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청나라 정부는 1891년, 재정난으로 인해서 북양, 남양 함대의 함선과 대포 구입을 2년 간 금지해, 북양 함대는 한 척도 증가하지 않았다. 청나라 정부가 해군력을 자만하고 있던 것이나, 최대의 실력자인 서태후(西太后)가 별궁 보수건축 등에 거액을 소비하여 재정난을 부른 것이 배경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하면, 정부의 자만심이나 서태후(西太后)의 이기심이 패전의 원인이 된다. 물론, 그 외에도 이유는 있다. 광서제(光緒帝)와 서태후(西太后)의 옹고집, 두 사람의 세력에 줄을 선 고관들의 대립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음으로 양으로 대일 전략과 관련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대체로 정치적 근대화의 지연을 원인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백수십년 전의 군비 확장의 역사를 보면서, 동지나해에서 서로 견제하고 있는 지금의 일본과 중국의 모습이 겹쳐졌다.

중국의 군비가 19년 연속해서 2자리 수 증가한 것이나, 착실하게 잠수 함대의 능력을 높이는 것 등을 지켜보며, 일본은 동지나해에서의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한편, 중국은 일본이 헌법을 개정하여, 해외에서의 무력행사의 방법을 모색하고, 일•미 공동 미사일 방위 망을 대만에까지 넓히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물론,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 바다에서 멀지 않은 장래에 일본과 중국이 다시 싸우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몇 차례나 상호 불신에 빠져, 상대 군사 동향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서로의 내셔널리즘에 불이 붙기 쉬운 것도 신경이 쓰인다.

중국의 청일 전쟁 연구의 제1인자는 청나라의 패배 원인의 하나로 외교의 실패를 든다. 산둥성(山東省) 역사학회 명예회장인 치치장(戚其章) 씨를 만나기 위해, 성도(省都)의 찌난시(済南市)로 향했다.

치씨에 의하면, 북양 함대의 책임자인 리훙장(李鴻章)은 전쟁을 회피하려고, 영국과 러시아의 알선에 기대를 하고 움직여 보았지만,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았다. 대만 할양에 관해서도, 영국에 대만의 권익을 주는 것으로써 일본으로의 할양을 막아 보려 하였지만, 영국 측에 거절당했다고 한다.

“일본은 열강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청나라보다 스스로가 러시아의 진출을 막을 수 있다고 영국에 선전했다”라고 치씨는 말한다. 열강의 태도도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던 청의 전략이 잘못이었다고 본다.

또 하나의 해변으로 향했다.

서태후(西太后)(1835~1908년)

청조 제 9대 황제인 함풍제(咸豊帝)의 왕비로, 동치제(同治帝)의 어머니이다. 젊은 황제의 옥좌 뒤로 늘어뜨린 발 안쪽에서 정치에 관여했다. 동치제가 사망한 후, 여동생의 아들인 광서제(光緒帝)를 세운다. 약 반세기에 걸쳐 권력을 잡았다. 여름의 별궁인 이화원(頤和園)을 타이베이(北京)에 수리・건축하고, 탄생 60주년 축하 행사 등에 거액을 쏟아 부어 재정을 압박했던 것이, 청일 전쟁의 패배로 이어졌다는 비판을 받는다. 1898년에는 정치 개혁 ‘무술변법(戊戌変法)’을 시작한 광서제를 유폐하는 등, 청조 멸망 직전까지 영향력을 가졌다.

본성인과 외성인 / 부딪치는 대만인의 역사관

대만 북동부에 있는 아우디(澳底). 해수욕장에 작은 물결이 일고 있었다. 태풍의 영향으로 수영은 금지되고 해변에 마련한 풀장에서, 아이들이 장난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1895년 5월, 이 바닷가에 일본군이 상륙했다. 대만은 일본과 청의 강화조약에 의해서 일본에 할양 되었지만, 식민지 지배가 순조롭게 시작된 것은 아니다. 대만의 관료와 명사들이 만든 ‘대만 민주국(台湾民主国)’군이나 지주 세력 등과의 싸움이 가을까지 계속 되었고, 그 후에도 무장 봉기가 자주 일어났다.

해변에는 항일기념비가 서 있었다. 이전에는 일본군의 상륙 기념비가 있었지만, 70년대에 바꾸었다.

대만 할양 역사에 대한 대만인들의 생각은 복잡하다. 국민당 정권 전부터 있었던 사람들은 대만인이란 의식이 강하고, 그 이후에 해협을 건너 온 사람들은 중국인이란 의식이 강한 경향이 있다. 양자 간에는 역사관에도 정치적 입장에도 차이가 있다.

민진 당(民進党)은 계속해서 대만인 의식을 호소한다. 국민당은 중국인 의식이 강하여 중국 대륙과의 통일도 시야에 넣는다.

타이베이(台北) 교외의 국사관은 대만사를 편집하는 총통부의 직속 기관이다. 민진당 정권이 들어선 이래, 관장을 맡고 있는 장옌시엔(張炎憲) 씨는 “대만인에게는 청나라에 버림을 받았다는 슬픈 정서가 있습니다”라고 한다. 청에서 대만으로 파견된 오늘날의 지사에 해당되는 관료가 일본군이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대륙으로 돌아간 것을 지적한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청일 전쟁 이후, 대만은 중국과는 다른 길을 걸어 왔습니다.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시켜, 민주와 자유를 포함한 현대 사회화를 목표로 해 온 일관된 흐름이 있습니다”. 한때는 일본의 통치를 받으면서도, 대륙과는 별도로,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자부가, 중국과 대만 문제에 영향을 준 것은 틀림이 없다.

한편, 국민당 안에서는, 대만할양의 실상이란 일본이 무력으로 청으로부터 대만은 잡아뗀 것으로, [일본의 침략]이라는 시각이 있다.

국민당 중앙당사위원회의 전 주임 위원이었던 첸펑옌(陳鵬仁) 씨는 타이베이(台北) 사무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남진을 하기 위한 징검돌이라는 군사적 이유와 차와 방충제등으로 쓰인 장뇌(樟脳)의 생산지이며, 더불어 일본의 시장을 확보하려는 경제적 이유에서 대만을 요구했겠지요”. “일본이(제2차 대전) 패전했을 때, 60세 이상의 사람들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다고 기뻐했습니다”

대만을 할양한 청에 대해서는 “일본과 계속 싸울 실력은 없었다. 어쩔 수 없었겠지요”라고 이해를 한다.

대만에서는 내년 3월로 임박한 총통 선거의 열기가 높아지고 있다. 7 월 초순에는 일본 통치시기의 대만인 활동가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 ‘역사와 정치의 대화’가 타이베이(台北)에서 열려, 민진 당의 셰창팅(謝長廷)후보와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 후보가 불꽃을 튀겼다. 일본에게 저항한 활동가를 마 씨가 평가하면, 셰 씨는 일본도 국민당도 외래 정권이었다, 라고 언급했다. 당장 역사관에서 부딪치고 있다.

이러한 대만사회의 행방을 중국이 주시하고 있다. 만약, 독립의 움직임을 보이면, 중국은 무력행사도 불사할 자세다. 대만 쪽 해안에 다수의 미사일을 배치하고 견제하며, 해군도 증강한다. 대만군도 중국과의 전쟁을 상정한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내가 방문한 아우디(澳底)는 한가로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11년 전 이곳 가까운 바다에 미사일이 날아 왔다. 첫 총통 선거를 앞두고, 중국이 ‘연습’이라는 명목으로 발사를 했던 것이다.

이 바다가 왠지 수상한 것은 110년 전과 그다지 변함이 없다.

(이소가와 토모요시(五十川倫義))

일본인의 아시아관-청일 전쟁으로 ‘멸시 감정’ 퍼지다

청일 전쟁은 일본인이 가진 중국과 조선의 이미지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예를 들면,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가 이끄는 “지지(時事)신보”에, 개전 직후인 1894년 7월 29일 ‘청일 전쟁은 문야(文野)의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게재했다.

‘문야’란 ‘문명’과 ‘야만’이다. 전쟁을, ‘문명개화의 진보를 도모하는’ 일본과 ‘진보를 막으려는’ 청나라의 싸움이라고 평가했다. 11월에는 조선에 대해서도, ‘문명류’ 개혁을 위해서는 ‘협박’이라는 수단도 불사하며, ‘국무의 실권’을 일본이 잡아야 한다고 사설을 실었다.

반전 주의자로 유명한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조차, 그 시점에서는 같은 인식이었다. 같은 해 8월, 일본은 ‘동양의 진보주의의 전사’이고, 중국은 ‘진보의 강적’이라 주장하는 영어 논문을 구미 잡지에 발표했다.

일중 관계를 연구하는 지바(千葉)현 소재 게이아이(敬愛) 대학의 이에치카 료코(家近亮子) 준 교수는 “청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에서는, 아시아는 뒤떨어져 있다는 인식이 뿌리 내렸다. 멸시 감정도 퍼졌다”고 지적한다. 그 의식은 10년 후의 러일 전쟁으로 한층 더 강해져, 중국 침략이라는 행위로 이어진다.

이런 의식은 지금도 어디엔가 남아 있지는 않을까. 이에치카씨는 7월, 학생들에게 “당신은 아시아인이라고 의식했던 적이 있습니까”라는 앙케트 조사를 했다.

교실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아시아인 유학생들은, 86%가 ‘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비해, ‘있다’라고 대답한 일본인은 63%에 머물렀다. ‘오히려 구미인 이라면 좋았겠다’라고 적은 학생도 있었다.

(요시자와 다쓰히코(吉沢龍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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