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청일전쟁]기억을 만드는것

  • 입력 2007년 8월 28일 14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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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아론이 게재된 지지(時事)신보. 당시의 신문이 게이오의숙(慶応義塾)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탈아론이 게재된 지지(時事)신보. 당시의 신문이 게이오의숙(慶応義塾)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중국, 한국, 대만, 일본의 지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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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걷기 하는 ‘탈아론’

메이지 태생의 ‘탈아론’은 올 봄에 122살이 되었지만, 아직도 건재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수만 건이 히트된다. 이번에는 알고 있을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잘 모르고 있는 ‘탈아론’을 해부해 본다.

중국・조선과의 ‘절교 선언’

‘탈아론’은 1885년 3월 16 일자, 일간지였던 “지지(時事)신보” 1면에 게재된 사설 제목이다. 특별히 이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당시 일간지의 상당수는, 사설을 1면에 싣는 스타일이었다.

서명은 없었지만, 필자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로, 오늘날로 치자면 주필 겸 논설 주임이라 할 수 있다. 분량은 2,000자 정도. 별권까지 포함해 22권인 『후쿠자와 유키치 전집』에 실린 것은 3페이지의 짧은 문장이다.

요점은 이러하다.

▽ 서양 문명은 ‘홍역’이 유행하는 것처럼, 막을 방법이 없다. 일본은 문명화를 받아 들여, 아시아에서 새로운 축을 마련했다. 그 주의는 ‘탈아’이다.

▽ 일본에 있어서 불행한 점은 근린의 중국, 조선이라는 국가가 근대화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양 문명이 밀려오는데, 변혁을 거부하고 옛것에 집착하고 있다. 즉, 국가의 독립을 유지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 양국이 메이지 유신과 같이 정치 체제를 변혁할 수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으면 몇 년 이내에 ‘망국’하여, 서양 제국에 분할되어 버릴 것이다.

▽ 지금의 중국, 조선은 일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양에서는 3개국이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일본도 중국이나 조선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되어 버린다. 그것은 ‘일본의 큰 불행’이다.

▽ 중국과 조선이 서양 문명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진흥시킬 여유가 없다. 오히려 그들과 헤어져 서양 열강과 함께 움직이자. 중국, 조선은 근린 국이라고는 하지만 특별 취급을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마지막 끝맺음은 이러하다. “악우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함께 악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마음속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를 사절해야 할 것이다”. 나쁜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면 평판도 나빠지기 때문에 ‘이제는 안녕’ 이라는 ‘절교 선언’이었다.

당시는 평판을 얻지 못하다

그럼, 이 사설이 어떻게 해서 태어났는가.

1884년 12월, 조선의 근대화를 목표로 하는 김옥균 등 친일파가 서울에서 쿠데타를 결행하였다.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한때는 왕궁을 점거하고 반대파를 숙청했다. 그런데 3일째 되던 날, 청나라 군에 진압되어 쿠데타는 실패하였다. 일본 공사관도 소실되었다. 일본인 사망자도 있었다.

이 큰 사건을 일본의 신문들이 앞 다투어 알리는 와중에, “지지(時事)신보”의 지면은 특별히 더 열을 내었다. 후쿠자와(福沢)는 김옥균 등과 친교가 있었고, 활동 지원을 위해서 게이오의숙(慶応義塾)의 문하생들을 조선에 보내고 있었다. ‘탈아론’은 친일파의 쿠데타 실패에 대한 실망에서 쓰인 것이었다.

그러나 게재 당시는, 그다지 평판을 얻지 못한 것 같다.

“지지(時事)신보”의 역사를 잘 아는 무사시노(武蔵野) 학원대의 도쿠라 타케유키(都倉武之) 강사에 의하면, “지지신보”는 당시 , 창간 3년 만에 7천 부 이상 부수가 급증했다. 인텔리 층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으로서는 톱클래스로 성장하고 있었다. 조선에 관한 보도로 더 한층 신뢰를 높였지만, ‘탈아론’이 단독으로 주목 받은 적은 없는 것 같다. 후쿠자와도 이후에는 ‘탈아론’에 대해 한 번도 거론하지 않았고, 탈아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도쿠라씨는 “ ‘지지(時事)신보’ 사내에서도 인용된 적이 없었으며, 그 존재는 잊혀졌다”라고 보고 있다.

침략의 논리로서 전후에 부활

잊혀졌던 ‘탈아론’이 재발견된 것은 제2차 대전 이후이다.

그 과정을 자세하게 밝힌 시즈오카(静岡) 현립대의 히라야마 요우(平山洋) 강사에 의하면, 최초로 인용된 것은 1951년이었다. 역사학자 토오야마 시게키(遠山茂樹)가 쓴 「청일 전쟁과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논문이었다고 한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의 외교 론이 재검토되는 가운데, 중국과 조선에 강경 자세를 취하는 ‘탈아론’이 연구 대상이 되어, 그에 따른 지명도가 올라갔다. 1983년에는 야마카와(山川) 출판사의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에서도 다루어 졌다.

중국과 한국에서도 ‘탈아론’은 차츰차츰 퍼져 나갔다. 서울대 국제 문제 연구소의 강상규(姜相圭) 연구원에 의하면, 한국에서 연구 논문에 ‘탈아론’을 인용한 예는 1970년 이후라고 한다. 80년대에 일본의 역사 교과서 문제가 일어나면서 ‘탈아론’은 일본의 침략 논리로서 재차 클로즈업 되었다. 현재는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도 인용된다. 중국에서도 2003년, 장쑤성(江蘇省) 등에서 대학 입시 문제에 나왔다.

일본어 인터넷에서도 ‘탈아론 ‘이라는 말은 난무한다. 야스쿠니 참배 등이 계기가 되어 시작된 근린 외교의 알력을 둘러싸고, 혹은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에 관한 논쟁 중, 중국이나 한국에 강경 자세를 요구하는 의견들 중에서 등장하는 경우가 눈에 띈다.

토오쿠라(都倉) 씨는 “탈아라는 말이 후쿠자와(福沢)로부터 떨어져 나가 독보하고 있다. 아시아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생각에 권위를 부여하거나 보강하려 할 때에 이용하기 좋게 사용되어 버린다”라고 말한다.

(요시자와 다쓰히코(吉沢龍彦))

▼기억을 만드는 것/지폐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라고 하면 만 엔 지폐의 초상화이다. 1984년에 쇼토쿠 태자(聖徳太子)로부터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 “지폐에 어울리는 품격이고, 국민 각층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며 국제적으로도 지명도가 높다”고 (일본 재무성 통화 기획 조정실) 선택한 이유를 설명한다. 그 말대로라면, 지폐의 초상화는 ‘나라의 얼굴’이며, 국가 이미지를 어느 정도 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은 어떠한가. ‘건국 50년’인 1999년에 디자인을 일신하여, 1원(元)에서 100원(元)까지를 모두 ‘건국 초기의 마오쩌둥(毛沢東)’의 초상화로 통일했다. 이전까지는 저우언라이(周恩来)의 초상화나, 소수 민족도 사용되었다. 왜 통일했는지의 공식 설명은 없다.

한국은 만원에는 한글의 창시자인 세종대왕을, 5천원과 천원에는 각각 유학자 이율곡과 이퇴계의 초상화를 사용한다. 2009년에는 10만원, 5만원 지폐를 발행할 예정으로, 누구의 초상화로 할까에 관심이 모여 진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여론 조사 등을 통해 선정할 방침이다.

일본은 일찍이 쇼토쿠 태자(聖徳太子)외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 메이지 유신기의 정치가의 초상화를 사용했지만, 84년 이후에는 오로지 문화인이다. 재무성은 “다른 외국에서도 문화인 초상의 이용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대만은 ‘나라의 아버지’라 칭해지는 쑨원(孫文)이 100원(元)에,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蔣介石)가 200원(元)이다. 보다 고액의 지폐에는 소년 야구팀이나 지구의를 보는 아이 등의 도안을 사용하고 있다. “쑨원(孫文)과 장제스(蔣介石)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정치적인 메시지를 약하게 했다”(대만중앙은행) 고 말한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1834~1901년)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계몽 사상가이다. 나카쓰(中津)번의 하급 무사의 집에서 태어나 오가타 코안(緒方洪庵)의 데키주쿠(適塾)에서 난학(蘭學)을 공부했다. 에도에 나와 영어를 배워 1860년에는 간린마루(咸臨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막부가 유럽에 파견한 사절단과 미국 견학 사절단에도 수행하였다. 처음에는 번(藩)의 요청으로 시작된 사설 교육시설을 1968년에 게이오의숙(慶応義塾)로 고쳐, 현재의 게이오(慶応) 대학이 되었다.

정부의 요직을 맡은 일은 없다. 언론과 교육계에서 활약했다. 『서양 사정』을 비롯하여 많은 저작이 있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글을 쓴 『학문의 권장』은 메이지 시대 초의 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82년에는 일간지, “지지(時事)신보”를 창간하였다. 이 신문은 후쿠자와(福沢)의 사후에도 1936년까지 존속되었으며, 제2차 대전 후에도 일시 복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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