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6년 홍위병, 中다싱현 집단학살

  • 입력 2007년 8월 27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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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8월 27일 붉은 완장을 찬 수천 명의 젊은이가 중국 베이징(北京) 남부 다싱(大興) 현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4류 분자(지주, 부농, 반혁명세력, 악질분자) 척결을 명분으로 광기(狂氣) 서린 살육에 돌입했다. 6일간의 학살로 태어난 지 38일된 유아부터 80세 노인까지 325명이 사망했다. 또 22가구는 전 가족이 몰살당했다.

홍위병. 공산주의 혁명 전통에서 ‘신성한 지위’를 갖고 있던 단어였다. 그러나 마오쩌둥(毛澤東·사진)의 중국에서 홍위병은 집단 최면에 걸린 무정부주의적 폭력조직으로 전락했다.

1966년 72세의 마오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라고 이름붙인 마지막 혁명극을 무대에 올렸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수정파의 득세로 위기의식을 느낀 그는 국가의 정치구조와 전 국민의 사회생활, 그리고 사람의 영혼을 통째로 개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4구(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 타파’를 내세우며 사회 전체에서 봉건주의와 자본주의를 걷어 내려고 했다.

기존 권위에 반기를 들라는 마오의 호소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회집단은 학생이었다. 그해 5월 베이징대에 ‘혁명지식인들이 모두 (혁명)전투에 참가할 것’을 선동하는 대자보가 붙자 마오는 “1960년대 베이징의 코뮌 선언”이라며 환호를 보냈다.

들불처럼 전국의 학교에 혁명조직이 결성됐다. 8월 18일 수백만 명의 청년이 톈안먼(天安門) 광장에 몰려들었다. 붉은 완장을 찬 채 톈안먼 위에 올라선 마오는 어린 학생들에게 ‘정치적 세례(洗禮)’를 했다. 홍위병들은 구시대로부터의 정신적 해방을 기치로 내세웠지만 마오 개인에 대한 숭배에 빠지면서 권력자의 정신적 노예로 추락했다.

혁명가 흉내를 내던 홍위병은 불과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종말을 맞는다. 각 분파가 정통 마오주의의 계승자를 자처하며 폭력적인 내분을 벌이기 시작했다. 또 도시 노동자와 농민들이 젊고 오만한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결국 마오는 1967년 홍위병의 해산을 명령했고, 전국에 정규군을 투입했다.

문화대혁명이 중국 현대사의 ‘잃어버린 10년’으로 치부되는 것처럼 홍위병은 중국인들이 잊고 싶어 하는 가장 비참한 기억 중 하나가 됐다. 이제 노년을 준비하는 당시의 홍위병 중 일부는 중국의 자본주의적 변혁을 이끌고 있겠지만 대다수는 궁벽한 오지로 쫓겨난 채 시대의 사생아로 남아 있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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