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한 中관리 뒤에는 애첩 있었다

  • 입력 2007년 8월 26일 15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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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 관리 뒤에는 정부(情婦)가 있다"

정부를 폭발물로 살해한 `지난(濟南) 7.19 폭발 살인사건'을 계기를 중국사회에서 개혁.개방 이후 다시 만연하고 있는 축첩 행위가 언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지난 7.19 폭발 살인사건'은 산둥(山東)성 지난시 부성장급 고위관리인 돤이(段義)가 13년된 자신의 정부로부터 정식 부부관계를 요구받고 폭발물을 이용해 청부살인을 한 사건으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 사건은 중국 고위급 관리로선 폭발물을 사용한 첫 살인 사례여서 충격파를 던졌고 돤이는 지난 9일 1심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당 기관지 광명일보는 25일 인터넷판에서 부패와 뇌물수수 등의 오명으로 불명예 퇴진하거나 중형을 받은 관리들의 문제를 기획기사로 다뤘다.

이 기사에 예시된 최고위 관리는 12년전인 지난 1995년 숙청된 천시퉁(陳希同) 전 베이징시 서기와 작년 6월 사회보장기금 유용 등 비리 혐의로 해임된 천량위(陳良宇.60) 상하이시 당 서기로 이들도 모두 첩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 6월3일 톈진(天津)시 신화(新華)로의 인민정치협상회의 건물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 쑹핑순(宋平順.61) 전 톈진시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도 자살후 조사 결과 첩을 두고 권력을 남용, 거액의 축재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언론들이 전했다.

청커제(成克杰)-리핑(李平) 사건도 유명하다.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 부위원장이던 청커제와 그의 정부 리핑은 서로 결탁해 4000만 위안(약 50억 원)의 뇌물을 챙겼다.

이들은 서로 배우자와 이혼한 후 재혼할 계획이었다. 청커제는 사형 선고를 받고 2000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밖에 장시(江西)성 부성장이던 후창칭(胡長淸)은 부패와 축첩이 드러난 후 `위선군자'라는 오명을 얻었고 장시성 부서기겸 성장이던 니시안처는 여자 문제로 성장 취임 1년4개월만에 낙마했다.

첩을 여러명 둔 케이스도 많았다. 2005년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인 하이난(海南)성 린가오(臨高)현 청린(城臨) 농촌대대의 대대장 출신인 덩산훙(鄧善紅)은 수뢰혐의로 구속됐는데 정부가 무려 6명이나 있었다.

덩산훙은 부인을 포함한 7명에게 모두 작은 사업체의 운영을 맡겼다. 작은 현내에 덩산훙이 정부를 위해 투자한 책방, 음식점 등이 4개나 있었다.

덩산훙은 7명의 여자에게서 모두 아이를 낳았고 어떤 정부와는 내연관계를 10년넘게 계속 이어왔다.

광둥(廣東)성 후이저우(惠州)시 보뤄(博羅)현 타이메이(泰美)진 전 당서기 천둥츠(陳東馳)도 첩이 5명이나 있었다.

일부 당ㆍ정과 국영기업 간부, 그리고 부호들은 개혁ㆍ개방 영향으로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정부를 두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으며 주변 친지도 이를 크게 문제삼지 않는 분위기다. 사회주의에 시장경제가 접목되면서 과거의 폐습이 되살아나고 있는 셈이다.

부패 관리들 뒤에 거의 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통계에서도 입증된다.

혼인법 개정안 전문 소조 책임자인 우창전(巫昌禎) 교수의 통계에 따르면 중국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부패 관리의 95%가 내연의 관계를 숨기고 있었고 부패 간부의 60%는 첩을 두고 있었다.

1999년 광저우, 선전, 주하이에서 부패혐의로 조사받은 공무원 102명은 전원이 혼외정사에 탐닉했다.

축첩의 만연에는 이를 크게 나무라지 않는 중국 사회의 분위기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정부를 두는 것은 사생활과 도덕문제로서 주변에서 참견할 필요가 없다는 `관용적' 사고가 팽배해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친지나 친구와의 모임에 정부를 `당당히' 데려오는 광경도 흔히 목격되곤 한다.

디지털뉴스팀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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