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풍경]출판사 ‘길’의 빛나는 길

  • 입력 2007년 8월 25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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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잠원동에 가면 5층짜리 롯데설악복지센터 건물이 있다. 잠원동 사람들은 이 건물을 흔히 설악상가라고 부른다. 바로 옆에 설악아파트(지금은 다른 아파트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있었고 이 건물에 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상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상가 건물 3층 한편엔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고급 교양 및 학술 서적을 전문으로 내는 ‘길’ 출판사가 있다. 상가 건물에 출판사가 있다는 점이 우선 이채롭다. 직원은 단 두 명. 2003년 문을 연 뒤 ‘존재와 언어’, ‘사유란 무엇인가’, ‘말의 미학’, ‘인간의 문제’, ‘세계 인권 사상사’, ‘죽은 신을 위하여’ 등 45종의 책을 냈다. 모두 좋은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길 출판사가 기획 중인 책은 200여 종. 놀라운 양이다. 참으로 부지런하고 열정적인 출판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 출판사는 2005년부터 1년에 두 명씩 저자들에게 연구비 또는 집필비를 지원하고 있다. 한 사람당 짧게는 1년 6개월부터 길게는 2년 6개월까지 지원해 준다. 이승우 주간은 “액수를 절대 밝히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지만 기자가 보기에 그 지원비는 적은 돈이 아니다. 이 주간의 말을 들어 보자.

“실력은 대단한데 이런저런 이유로 강단에 서지 못한 사람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생활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지원을 하게 됐습니다. 저자들에게 출판사가 함께 고민하고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고 그래야 필자 분들이 좀 더 편안하게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아주 작은 규모의 출판사가, 그것도 잘 팔리지 않는 학술서적을 내는 출판사가 매년 2000만 원이 훨씬 넘는 돈을 저자들에게 지원해 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학문과 출판에 대한 깊은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 정성이 통했을까. 길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은 대부분 꾸준히 팔리는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길 출판사는 요즘 더 큰 것을 꿈꾸고 있다. 1, 2년 정도 지나 출판사가 본궤도에 오르면 저자들의 학술 토론 모임을 만드는 것이다. 정기적인 학술 모임을 통해 출판의 기획 방향 및 한국 학술 출판의 발전 방향 등에 대해 논의할 기회를 만들 계획이다. 이 주간이 모델로 삼는 출판사는 독일의 ‘주어캄프(Suhrkamp)’. 주어캄프의 경우 출판사 관계자들과 유명 저자들이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다고 한다. 위르겐 하버마스, 울리히 벡과 같은 쟁쟁한 사회철학자들이 이 모임에 참가해 출판 방향을 논의하고 이를 통해 독일 사회철학의 발전을 주도해 오고 있다.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학술 출판은 저자와 출판사가 의식을 공유해야 한다, 저자들에게 좋은 글을 쓰도록 지원해야 좋은 책이 나올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주간의 신념이다. 그의 신념이 좋은 결과로 이어져 한국의 주어캄프가 출현하길 기대해 본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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