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소설들 순수문학으로 스며들다

  • 입력 2007년 8월 24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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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출간되는 김연수(37) 씨의 장편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은 독일로 간 대학생이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을 찾아다니는 이야기다. 주인공 대학생과 여자친구, 주인공의 조부, 만나기로 한 사내 등 등장인물의 개인사가 퍼즐처럼 얽혀 전개된다. 의문을 절묘하게 풀어 가는 추리 기법을 적용한 소설이다.

김 씨는 “긴박감을 갖추고 다음 장을 궁금하게 만드는 서사의 전략 면에서 추리소설의 형식이 유용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추리소설, SF, 판타지, 칙릿(chick-lit), 공포소설…. 이른바 ‘장르문학’으로 불리는 소설들이다. ‘재미를 주기 위한 대중소설’로 여겨져 ‘비주류’로 구분됐던 장르문학이 최근 순수소설과 섞이고 있다. 젊은 작가들이 장르문학의 특성을 작품에 끌어들이는 것.

우선 SF 및 판타지와의 접속이 두드러진다. 박민규(39) 씨는 서기 2487년의 지구를 배경으로 한 최근 단편 ‘깊’을 포함해 장편 ‘핑퐁’, 소설집 ‘카스테라’에서 지구 밖으로 뻗어 나가는 상상력을 보여 준다.

윤이형(32) 씨는 단편 ‘아이반’에서 사이보그를 등장시켰고, 김중혁(36) 씨는 소설집 ‘펭귄뉴스’에서 ‘(음악의) 비트 해방운동’이 벌어지는 판타지 공간을 선보였다.

모두 SF소설에서 나올 법한 장치다. 더욱이 5월 창간한 장르문학 전문 월간지 ‘판타스틱’에서는 복거일 박민규 박형서 씨 등 순수문학 작가들이 쓴 SF나 판타지 소설적 특성이 강한 작품을 싣고 있다. 장르문학을 천대했던 국내 문단의 풍토를 비춰 보면 큰 변화다.

또 올해 ‘오늘의작가상’ 수상작인 이홍(29) 씨의 ‘걸프렌즈’는 ‘한국형 칙릿’으로 불린다. ‘칙릿’을 ‘젊은 여성들이 재미로 읽는 소설’로나 여기던 평단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작품의 수상 결정이 놀랍다.

지난달 나온 편혜영(35) 씨의 소설집 ‘사육장 쪽으로’는 공포소설과 닮았다. 안온한 삶을 꿈꾸며 옮겨간 전원주택 주변에서 개들의 울음소리가 무시무시하게 들리는 표제작은 “낯익은 것(일상)이 낯선 것(악몽)으로 돌변할 때 발생하는 섬뜩함을 준다”(평론가 신형철)는 평을 받았다. 이것은 ‘익숙한 사물이나 사람이 갑자기 낯설게 보일 때의 엄청난 두려움’을 그려내는 공포소설 작가 스티븐 킹의 작품 세계와 일치한다.

이 같은 경향에 대해 평론가 강유정 씨는 사회적 이슈를 둘러싼 거대 담론이 없는 시대에 작가들이 다양한 실험을 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장르문학이란 작가가 문제를 만들어 내고 답을 풀어 가는 형식을 취하는데, 2000년대 이후 공유하는 사회 담론이 사라지면서 순수문학 작가들이 소설에서 풀어야 할 문제를 스스로 찾게 됐고 장르문학적 형식과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됐다”고 풀이했다.

평론가 김동식 씨도 “정치적 억압의 시대가 지난 뒤 작가들은 정체성의 근거를 국가나 가족이 아닌 ‘문화’에 두기 시작했다”며 “장르문학은 엄연한 문화의 일부이며, 2000년대 이후 순수문학 작가들이 이런 문화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한다.

한편으로 한국 문단에서 장편 창작에 대한 욕구가 커지면서 서사의 밀도를 높일 수 있는 다양한 장르문학적 장치를 도입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SF평론가 박상준 씨는 “(주류문학이) 리듬감 있고 잘 읽힌다는 대중소설의 서사적 특징을 끌어들이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며 “활자매체보다 영상매체에 익숙해진 독자 취향의 변화를 의식한 창작활동”이라고 말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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