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정위용]‘反세계화의 덫’ 러시아

  • 입력 2007년 8월 23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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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1병을 10루블에 수입해 12루블에 도매상에 넘긴 뒤 다시 소매점에서 20루블에 되사서 마시는 것이 러시아식 비즈니스다.’

1990년대 러시아가 자본주의를 도입할 당시 유행했던 유머 가운데 하나다. 사회주의 체제에 익숙해 있던 러시아 상인들을 비꼬기 위해 러시아에 진출한 서유럽 상사 주재원들이 즐겨 사용했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저자 토머스 프리드먼은 1995년 당시 모스크바를 여행하면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러시아를 ‘도둑 정치(Kleptocracy)’가 판치는 사회로 봤다.

그는 “러시아가 세계화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심장을 통째로 교체하는 이식수술이 필요하다”며 러시아의 세계화 지수를 가장 낮은 수준으로 평가했다.

그랬던 러시아가 지금은 세계 9위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국가로 성장했다. 또 미국이 이라크에서 고전하는 틈을 타 냉전 종식 후 세계 정치의 질서로 자리 잡은 미국의 일극체제에 맞서는 모습도 종종 비친다.

러시아의 급성장과 세계화 지수 향상이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드물다. 대다수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자본주의를 국가의 운영 시스템으로 도입해 성장한 것은 분명하지만 성장 동력은 높은 국제 유가와 천연자원 수출에서 나왔다고 분석한다.

세계은행은 1996년부터 2006년까지 러시아의 기업지배구조가 베네수엘라, 이란과 마찬가지로 제자리걸음을 했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기업지배구조 평가는 세계은행이 세계화를 진단하는 중요한 척도다.

1990년대 러시아의 유치한 자본주의 체제를 비웃던 글로벌 기업들은 지금 러시아의 반(反)세계화 장벽에 새삼 놀라고 있다.

지난해 초 시베리아에서 물품을 실어 나르던 일본의 한 기업은 톰스크 시내 관문을 지키던 러시아 경찰관 한 명에게 1000달러를 1년 치 뇌물로 줬다. 이 회사는 트럭이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돈을 뜯는 경찰관 때문에 납기를 맞출 수 없어 돈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뇌물을 준 다음 날 이 회사 트럭은 경찰 검문에 또 걸렸다. 차를 세운 경관은 “전에 근무하던 경관은 다른 곳으로 인사 발령이 났다”고 말했다.

반세계화 덫에 걸려든 기업들은 ‘자본의 힘’도 써 보지 못하는 실정이다.

영국의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은 지난해 9억3600만 달러의 ‘세금 폭탄’을 맞은 데 이어 올해에는 시베리아 코빅타 가스전 개발 허가권을 뺏겼다. 외국 언론들이 “국가의 후원으로 진행되는 강탈 행위”라고 비난했으나 러시아가 사태를 되돌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러시아에 진출한 삼성, 현대자동차, LG 등 한국의 글로벌 기업들도 일방적인 계약 파기, 회계처리를 할 수 없는 뒷돈 요구, 국제 경쟁력 무력화 정책 등 러시아의 반세계화 늪에서 고생했다.

LG상사가 2004년 러시아 타타르스탄 타트네프티와 체결한 정유시설 수주 계약은 공사대금 3조 원 규모의 대형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이 계약을 깨고 입찰 방식을 바꾸었다. 한국 기업들은 한 걸음 나아가 직접 투자 단계에서도 이런 장벽에 부닥치고 있다.

물론 러시아가 세계화 프로그램을 모두 닫지는 않았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추진하는 한편 일부 외국 기업을 견제하는 어정쩡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반세계화의 흐름이 더 눈에 띌 가능성도 있다.

다만 강한 무역 파트너로 떠오른 러시아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세계화 격차에 따른 리스크 관리와 유연성을 더욱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위용 모스크바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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