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대선후보 이명박은 누구

  • 입력 2007년 8월 20일 17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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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든 국가든 경영의 본질은 같은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20대의 원점으로 복귀했다. 한때 기업 성장의 불을 밝히기 위해 뛰었던 내가 이제는 우리 모두의 성장을 위해 더 열심히 뛰어야겠다고…."

한나라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1995년 1월 펴낸 자전적 에세이집 '신화는 없다'의 에필로그에 올린 글이다.

마치 12년 뒤 대권에 도전할 자신의 모습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는 최고권력자가 아닌 최고경영자(CEO)의 꿈을 키우며 '샐러리맨의 신화'에 이은 '청계천 신화' '대권신화'를 일찌감치 준비했다.

그의 신화는 굴곡 많았던 대한민국 근·현대사와 함께 한다. 그의 오늘을 키운 힘은 '가난'과 '어머니', 그리고 '긍정의 힘'이다.

이 나라 60대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이 후보는 일제시대와 광복, 6·25 전쟁과 자유화, 군사독재정권과 산업화, 민주화와 세계화 시대로 이어지는 격동의 파고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넘어왔다.

그가 걸어온 길에 항상 따라다닌 '신화'라는 수식어가 말해주 듯 그의 일대기는 보통 사람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과 경험하기 힘든 기적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그는 "신화는 없다"라고 말한다.

철들기 전부터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벌였던 좌판은 그를 강인하게 단련했고, 찢어지는 가난함 속에서도 안정된 가풍을 만들었던 어머니는 그의 인간성 형성에 자양분을 제공했고, 수없는 위기에 맞닥뜨리면서도 버리지 않았던 스스로에 대한 신념은 그의 리더십을 담금질했다 것이 이 후보의 '자찬'이다.

물론 신화에는 이면도 있다. 특히 그의 길지 않은 정치 이력에는 영욕이 함께 했던 게 사실이다. 정당 사상 최악의 과열경선을 거쳐온 그가 본선을 거쳐 청와대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남은 장애물이 지나온 파도만큼이나 높아 보인다는 지적도 이래서 나온다.

◇가난, 그리고 어머니

이 후보는 일제치하였던 1941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충우(1981년 작고) 씨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채태원(1964년 작고) 씨 사이에서 난 4남3녀(귀선, 상은, 상득, 귀애, 명박, 귀분, 상필)가운데 다섯째였다.

아버지 이 씨는 포항시 흥해읍 덕성리가 고향인 목부(牧夫)로, 고향사람의 중매로 지금은 대구로 편입된 반야월 출신의 어머니 채 씨를 만난 뒤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신접살림을 차렸다.

족보에 올라있는 이 후보의 이름은 형제들과 같이 '상(相)'자 돌림을 딴 '상경(相京)'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치마폭에 보름달을 안는 꿈을 꿨다고 해서 '명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출생지가 일본인데다 형제들과 달리 호적상에 돌림자를 쓰지 않았고 공교롭게도 '아키히로(明博)'라는 일본 이름과 한자가 같아 "어머니가 일본인이다" "아버지가 조총련이다"라는 '뒷말'을 낳기도 했다.

해방 직후 귀국선에 올라 아버지는 동지상고 재단 이사장의 목장에서 일을 하고, 어머니는 과일행상에 나섰지만 가난은 지겹도록 그를 따라다녔다. 그런 와중에 집안의 희망은 포항에서 수재로 이름을 날렸던 둘째 아들(이상득 국회부의장)이었고, 자연히 이 후보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6·25 전쟁을 겪으면서 누나(귀애)와 막내(상필)를 잃고,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이 후보는 술 지게미로 하루 두끼를 때웠고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아예 어머니의 풀빵장사를 돕기 위해 길거리로 나서기도 했다.

서울대 상대에 입학한 둘째 형의 뒷바라지를 위해 고등학교 진학을 거의 포기하려던 즈음 한 은사를 만난 그는 진학의 꿈을 이뤄내기 위해 어머니와 담판을 벌여 "학비는 한푼도 달라고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허가를 받아냈다. 결국 동지상고(야간) 수석 합격과 3년 연속 수석을 이뤄내 무일푼으로 고교 졸업장을 따냈다.

이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한 이 후보는 온갖 잡일을 하면서도 '고졸'보다는 '대학 중퇴'가 취직하는 데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에 대입을 준비했고 청계천 헌책방에서 헐값에 구입한 참고서로 고려대 상대에 합격했다.

이태원시장에서 매일 새벽 쓰레기를 치우는 일로 근근이 학비를 마련하며 대학을 다녔던 이 후보는 3학년 때는 상대 학생회장에 당선돼 6·3사태의 주모자로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을 복역, '민주화 투사'라는 이력을 보탰다. 그러나 그는 석방 한달여만에 어머니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이 후보가 지난해 6월말 서울시장 퇴임 후 대권행보에 나서면서 각종 강연과 연설에서 거의 빼놓지 않는 일화는 모두 가난과 어머니가 주인공이다.

동지상고 재학시절 여학교 정문앞에서 뻥튀기 장사를 하는 것이 부끄러워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본 어머니는 "뭐가 부끄럽느냐. 네가 구걸을 하느냐, 남을 속이느냐. 당당하게 살아라"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또 6·3 시위로 구속수감됐을 때 흰색 저고리를 입고 면회를 온 어머니는 "명박아, 나는 네가 별 볼 일 없는 놈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너야말로 대단한 놈이더구나. 소신대로 행동하거라. 어미는 널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말을 던지곤 뒤돌아섰다는 후일담이 회자되고 있다.

◇이 과장, 불도저를 해체하다

이 후보의 일생에서 어머니만큼이나 큰 인연은 역시 '왕회장'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가난으로 점철된 그의 성장기는 정주영이라는 기업인을 만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그의 남다른 기질은 취직할 때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학생운동으로 복역한 전과 때문에 취직이 어렵게 되자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정부의 부당한 '취직방해'를 비판하는 편지를 썼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현대건설이라는 중소기업에 입사를 하게 된다.

타고난 부지런함과 과감한 문제제기로 입사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대리로 승진한 것을 시작으로 29세 이사에 이어 불과 35세에 현대건설의 사장이 됐고 이후 최장수 CEO(최고경영자)의 역사를 쓰게 된다.

이 후보의 도전정신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 태국에서 근무하던 중 현대건설 중기사업소(현대중공업) 과장으로 발령을 받고 귀국한 그는 경부고속도로 공사에 장비를 공급하는 업무를 맡았다.

당시 불도저가 거의 매일 고장이 나는데다 기술자들이 텃세를 부리면서 공사에 큰 차질을 빚자 이 과장은 어느날 밤새 고장 난 불도저를 해체한 뒤 이를 다시 조립하면서 구조를 완전히 익혔다. 이를 본 기술자들이 이후부터 이 후보의 지시라면 곧이곧대로 따랐고 이를 정주영 회장이 우연히 지켜본 것이 이후 현대그룹에서 승승장구한 결정적인 배경이 됐다.

현대그룹에 있으면서 그는 이화여대 메이퀸 출신의 부인 김윤옥 씨와 결혼했고 세 딸(주연, 승연, 수연 씨)과 외아들(시형 씨)도 얻었다.

20여년간 CEO로 지내면서 돈도 많이 벌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도 벗어났다. 기준시가로만 330억 원을 웃도는 이 후보의 재산은 현대그룹 시절 중동에서 대형공사를 많이 따내면서 성과급으로 받은 것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논현동에 있는 단독주택은 정주영 회장이 손님접대용으로 지어준 것이다.

◇달동네로 간 서울시장

민선 3기 시장으로 서울시청에 들어선 이 전 시장은 4년간 청계천 복원, 대중교통체계 개편, 서울숲과 서울광장 조성 등 역대 어느 시장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대형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불도저'라는 별명에는 "강한 추진력을 보였다"는 찬사와 함께 "개발주의식 행정을 했다"는 비판도 함께 따랐다.

대표적인 사업은 두말할 것 없이 청계천 복원. 취임 즉시 작업에 착수, 불과 1년 후인 2003년 7월 청계고가도로를 완전 철거하고 이후 2년 3개월간 복원공사를 벌여 2005년 10월 5.84㎞의 청계천의 물길을 다시 시민의 품으로 넘겨줬다.

복원 과정에서의 문화유산 훼손, 동대문운동장으로 이전시킨 노점장 문제 등이 미완의 과제로 남았으나 4000여 회에 걸친 협상 끝에 20만 상인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 청계천을 시민 휴식공간, 관광명소는 물론 생태자원의 보고로 만들어낸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그의 치적이다.

그는 그러나 서울시장 재임시절 복지예산을 가장 많이 늘렸다는 점을 청계천 복원 못지 않은 '자랑'으로 여긴다. 스스로 '사회적 약자' 출신으로, 성장기에 남의 도움을 많이 받은 데 대해 보답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라고 한다.

실제로 그는 시장이 되자마자 젊은 시절 살았던 한 달동네를 찾았다. 또 서울시장으로 첫번째 소집한 관계기관 회의가 무료환자 치료를 위한 시립병원 의사, 간호사 회의였고, 시장 취임 후 첫 작품이 중증 장애인 택시 도입이라는 점을 은근히 자랑한다.

◇'여의도 입성' 15년… 그리고 대권 도전

이 후보가 정치를 처음 시작한 것은1992년 당시 신한국당 대표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전국구 공천을 통해서다.

앞서 노태우 정권 말기였던 1991년 정주영 회장이 1600억 원에 이르는 추징금을 맞은데 '앙심'을 품고 아예 당을 만들어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을 뜯어말렸던 이 후보는 '왕회장'과 길을 달리해 집권 여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기업인 이명박'에게 정치판은 녹록지 않았다. 1995년 서울시장 경선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이듬해 총선에서 '정치 1번지' 종로구에 출마해 이종찬씨를 누르고 당선됐지만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았고, 이 와중에 1998년에 다시 서울시장 경선에 도전, 최병렬 씨와 경쟁했지만 선거법 재판이 끝나지 않아 의원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2002년 삼수만에 서울시청에 입성한 이 후보는 4년간의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대권 도전장을 내놨다. 서울시장 선거공약으로 '청계천 복원'을 걸었던 그는 이번에는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제안했다.

다수의 반대를 꺾고 청계천 복원과 대중교통체계 개편 등을 성공시킴으로써 강력한 추진력을 대중에 각인시킨 그는 보수정당 소속이면서도 '실천하는 개혁가'라는 이미지 구축에 성공하면서 이념, 연령, 계층, 지역에 관계없이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청와대로 향하는 길은 그의 인생역정 만큼이나 험하다. 올해 6월말 서울시장직 퇴임 이후 여론지지율 1위 후보로 올라서면서 당 안팎의 끊임없는 검증 공세에 시달리며 그 어느 때보다 힘든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기에 1년 2개월간의 '지독한' 경선전을 치르고 힘겹게 대권의 첫 관문을 통과한 그의 각오는 남다르다. 그는 "나는 대한민국을 위해서 온 몸을 바쳐서 일하고 싶다. 나는 대한민국을 위해서 정말 죽어라고 일하고 싶다. 나는 말 잘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일 잘하는 대통령이 될 것이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면 세상이 달라진다"고 외친다.

디지털뉴스팀·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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