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문명]記者내쫓고 그들은 무얼 할까

  • 입력 2007년 8월 19일 19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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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6월부터 2년 반 동안 사회부 경찰기자를 했다. 선배들처럼 새벽부터 경찰서와 병원을 헤집고 다녔다. 기자 입문 필수코스여서 여자라고 예외가 없었다. 우리 사회의 단면을 생으로 보여 주는 현장에서 매일 좌절하고 왜 기자가 되려고 했는지 후회했다.

유족들로부터 당할 봉변을 감수하면서 ‘고인의 사인(死因)’을 물어야 하는 종합병원 영안실 취재도 싫었지만 살인, 강도, 성폭행 피의자들로 북적이고 밤샘 근무로 신경이 곤두선 형사들과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형사계 취재는 더 싫었다. 두려울 때도 많았다.

때로 형사들을 거친 말투로 무례하게 대한 것은 공권력 앞에서 주눅 들기 일쑤인 소심한 내면을 감추기 위한 허세였는지도 모른다. 당차게 행동하지 않으면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곳이 경찰서였다.

형사계의 육중한 철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눈이 마주친 당직 형사는 화들짝 놀라며 자료를 감추었고, 피의자에게 퍼붓던 욕설 섞인 고함을 낮추기도 했다. 모두 반갑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새벽마다 피의자 대기실 앞에 서서 “억울한 분 계세요”라고 외쳐 대는 기자들이 얼마나 미웠을까.

어느 날 50대 아주머니가 기자실로 나를 찾아왔다. 사기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지만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는 것이다. “억울한 사람 없어요”라고 소리치던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경찰서를 담당하는 여기자가 드물었던 터라 쉽게 소속 신문사를 알아낼 수 있었다고 했다.

나는 하마터면 사기꾼으로 몰릴 뻔했던 그의 사연을 본보의 1991년 7월 5일자 ‘창(窓)’이라는 고정란에 ‘그동안의 피해는 어쩝니까’라는 제목으로 소개했다. 열 명의 피의자를 놓치더라도 한 사람의 인권을 보호하라는 형사계 입구의 푯말도 인용했다.

이후 다른 출입처를 거쳐 6년 만인 2000년 11월 경찰기자 팀장(서울시경 캡)으로 사건 취재 일선에 복귀했다. 후배 기자들의 새벽 경찰서 돌기 취재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사건이 나면 며칠이고 경찰서에서 밤을 새워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잘못된 수사 관행이 줄긴 했어도 ‘감추려는 그들과 파헤치려는 기자’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기자실이 민원실처럼 변했다. 경찰서에 기자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시민들은 과거보다 자주 기자실을 찾았고, 때로는 기자들의 중재로 경찰에 대한 오해를 풀고 가기도 했다. 기자실은 기자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경찰과 기자, 그리고 힘없는 시민들이 만나는 또 다른 소통의 장(場)이 돼 있었다.

지금은 민원창구도 많아졌고 ‘인터넷 신문고’도 활성화됐지만 모두 ‘당하고 난 다음’이라는 한계가 있다. 변호사의 도움을 일일이 받을 수 없는 한국적 상황에서 경찰서 기자실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인권의 파수꾼’ 역할을 해 왔다.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랍시고 기자들을 모두 경찰서 밖으로 내쫓고 ‘해방의 쾌재’를 부를 그들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어느 사회나 권력은 사실을 은폐, 조작, 축소, 왜곡하려는 속성이 있다. 비민주적이고 무능한 권력일수록 더 그렇다. 자유로운 정보 유통은 그들에게 항상 위협적이다. 이 정권은 기자실에 대못을 박고, 권력을 감시하려는 기자들을 한낱 ‘브리핑룸의 통신원’으로 전락시켰다. ‘기자실 없는 경찰서’에서 그들은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허문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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