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미경]한국은 ‘타인의 사회’

  • 입력 2007년 8월 15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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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못 봤나. 절대 아닌데….’

요즘 이런 생각을 수십 번씩 한다.

올 4월 미국 비영리 학술단체 ‘동서센터’ 초청으로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분명히 기자실을 둘러봤다. 상주 기자들을 위한 의회 기자실은 상원 하원에 모두 마련돼 있었고 본회의장 옆쪽에 기자실과 직접 연결되는 쪽문까지 있었다.

기자실에는 기자가 1, 2명밖에 없었다. 자유롭게 의원들 방을 찾아다니며 취재하기 때문에 자리에는 거의 없다고 담당자는 설명했다.

국무부, 국방부 브리핑룸에서 앞줄 좌석은 AP, 로이터, 뉴욕타임스 등 ‘메이저 매체’의 기자들에게 배정돼 있었다. 주요 매체들은 먼저 질문할 수 있는 권리도 있었다. 획일적 평등보다는 ‘시장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었다.

최근 국정홍보처는 공사도 끝나지 않은 통합 브리핑센터로 기자들을 내몰면서 “선진국에는 기자실이 없다”고 여전히 강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미국에서 헛것을 봤단 말인가.

얼마 전 스텐 톨리포르스 스웨덴 통상장관과 인터뷰하면서 스웨덴이라는 나라에 대한 ‘오해’ 하나가 풀렸다.

스웨덴은 노조가입률이 90%를 넘지만 파업이나 시위는 거의 없다.

우리 노동계와 진보세력은 그 이유를 1930년대 스웨덴 사회대협약 이후 노조총연맹 지도부가 경영자와 정부 측에 회유돼 노조원들의 투쟁력을 분열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장관의 얘기는 달랐다. 지도부의 지도력 부재가 아니라 노조원들의 자발적인 선택에 따라 파업을 자제해 왔다는 것이다.

스웨덴에서 파업결의 투표를 해 보았자 찬성률이 10% 이하이고, 특히 시장개방 문제는 5%에도 못 미친다. 경제의 80%를 무역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개방이 생존의 필수조건이란 것을 노동자들이 더 잘 알기 때문이라고 한다. 톨리포르스 장관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자제하니 사회대협약 자체가 유명무실해졌다”고 설명했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은 이미 수십 년 전 폐기되다시피 한 사회대협약을 인용하며 “스웨덴이 사회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강조했다.

스웨덴 이외에도 참여정부의 ‘연구 대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해외 사례는 적지 않다. 평등교육을 위한 프랑스 교육시스템, 양극화 해소를 위한 미국 해밀턴 프로젝트, 노사협력을 위한 네덜란드 노사 모델, 여기에 요즘 논란이 되는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까지.

이런 사례들은 대개 집권층이 유리한 것만 끌어오거나 변형했다가 학계와 언론의 비판을 받고 용두사미 격으로 사라졌다.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몇 년 전 한국을 ‘타인의 사회’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민족주의적 성향이 높은 개인과 집단일수록 자신의 의견을 밀고 나가기 위해 타인(외부세계)의 판단과 경험에 더 매달리는 경향이 높다는 것이다.

유난히 ‘자주’를 외치는 정부가 정책 홍보를 위해 외국 사례를 편리한 대로 끌어다 쓰는 것은 ‘사상적 빈곤’을 보여 주는 것 같아 뒷맛이 쓰다.

개인이야 외부의 판단에 매달리든 말든 혼자 책임지면 그만이지만 정부에 의해 제멋대로 요리되는 선진제도와 시스템은 국민의 세계관, 세계화 감각까지 왜곡해 버리지 않을까 걱정된다.

정미경 교육생활부 차장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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