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남북 정상회담의 文法

  • 입력 2007년 8월 13일 20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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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 방식에는 입구론(入口論)과 출구론(出口論)이 있다. 전자는 정상끼리 큰 틀에 합의하고 구체적인 것은 실무자들에게 넘기는 방식이다. 후자는 실무자들이 웬만큼 합의를 하고, 풀리지 않은 쟁점들은 정상들이 타결짓는 방식이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은 입구론에 가까웠다. 회담의 산물인 6·15 공동선언은 실무자들 간에 충분한 협의가 이뤄진 게 아니라 당시 김대중(DJ)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에 합의된 것이었다.

이번 회담은 어떻게 될까. 의제(議題)도 정해지지 않은 데다 사전에 협의할 시간마저 많지 않아 입구론 방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회담은 두 정상의 개인적인 역량, 동기(動機), 선호(選好), 순발력 등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중요한 회담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의 토론 솜씨에 기대를 거는 사람도 있는 듯하나 위험한 생각이다. 북의 전략이 얼마나 집요하고 치밀한지 몰라서 그렇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채택 당시 김일성 주석은 우리 측이 북의 주장대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을 ‘통일의 3대 원칙’으로 받아들이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 좋은 말들 속에 북의 대남(對南) 통일전선전략의 칼이 숨겨져 있는데도 흔쾌히 동의하자 반신반의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핵심 내용인 ‘민족 대단결’은 노골적으로 주한미군 철수를 노리는 것이어서 남측이 좀처럼 수용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DJ가 再포장한 ‘민족대단결’

북은 즉각 민족 대단결을 내세워 우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민족 대단결에 합의해 놓고 통일의 장애인 주한미군을 왜 놔두느냐” “국가보안법부터 폐지하라”는 요구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낭패였다. 애초 북이 ‘민족 대단결’을 들고 나왔을 때 그 전략적 의미를 간파했어야 했다.

정부가 문제의 심각성에 주목한 것은 훨씬 뒤인 1989년이다. 당시 정부는 통일 방안을 성안(成案) 중이었는데 역시 ‘민족 대단결’이 마음에 걸렸다. 북의 속셈이 뻔히 들여다보이는데 7·4공동성명에 명시된 통일의 3대 원칙 중의 하나라고 해서 그대로 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민족 대단결을 ‘민주(民主)’로 바꿨다. 통일의 3대 원칙을 자주, 평화, 민주로 새롭게 천명한 것이다.

그렇다고 북의 공세가 완화된 것은 아니었다. 민족 대단결은 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민족 공조’로 바뀌었고, ‘민족 공조’는 다시 ‘우리 민족끼리’가 되어 지금 이 순간도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다.

이 과정에서 DJ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평양 정상회담에서 김 국방위원장과 ‘통일 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해결해 나가자’(6·15공동선언 1항)고 합의함으로써 ‘민족 대단결’을 ‘우리 민족끼리’라는 이름으로 재(再)포장해 내놓는데 동조했기 때문이다.

이후 좌파의 통일운동은 ‘우리 민족끼리’ 운동으로 급속히 수렴되고 있다. 운동본부가 결성되고, 실천의 결의를 다지는 행사가 해마다 남북을 오가며 열리고 있다. 북은 6월 15일을 ‘우리 민족끼리의 날’로 선포하기까지 했다. 평택 미군기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거의 모든 반대시위 현장에는 어김없이 ‘우리 민족끼리’ 깃발이 숲을 이룬다.

나는 지금도 당시 DJ가 왜 그렇게 쉽게 ‘우리 민족끼리’에 동의해 줬는지 궁금하다. 통일 문제에 밝다는 그가 ‘우리 민족끼리’의 뿌리가 ‘민족 대단결’임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우리 민족끼리’를 문서로 합의해 줄 경우, 그것이 북에 의해 어떻게 이용되리라는 것을 몰랐던 것일까. DJ는 아마 ‘탈(脫)냉전의 시대 흐름 속에 우리 사회도 그 정도는 견디어 낼 만큼 성장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우리 민족끼리’라는 말의 전략적 의미를 미처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 길이 민족 화해의 첩경이라고 진짜 믿었을지도 모른다.

盧대통령, 토론 솜씨 過信말라

이유를 막론하고 이번 회담에서 그런 일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 노 대통령의 말솜씨야 정평이 나 있지만, 그래서 더 걱정이다. 이번 회담도 ‘입구론’ 방식이 될 가능성이 커 실무자들의 도움 없이 두 정상이 큰 틀에서 합의할 현안이 많을 것이란 전망이다. 말 한마디 잘못해 ‘민족 대단결(우리 민족끼리)의 악몽’처럼 우리를 옥죄는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 상대는 노회한 김 국방위원장이다. 사전 준비에 최선을 다하고, 회담에선 가능한 한 말을 아껴야 한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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