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유랑도 서러운데 기본권도 없다니…”

  • 입력 2007년 8월 13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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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모스크바의 고려인 문화 행사장을 찾은 고려인 3, 4세들. 이들의 부모 세대는 대부분 완전한 복권을 하지 못했다. 사진 제공 모스크바 고려인협회
러시아 모스크바의 고려인 문화 행사장을 찾은 고려인 3, 4세들. 이들의 부모 세대는 대부분 완전한 복권을 하지 못했다. 사진 제공 모스크바 고려인협회
《21일은 구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극동 러시아의 조선인들에게 강제 이주 명령을 내리는 ‘극동 국경지역 조선인 추방에 관한 명령’에 서명한 지 70주년이 되는 날. 소련이 해체된 지도 이미 15년이 넘었지만 독립국가연합(CIS)의 고려인 상당수는 아직 완전한 권리를 회복하지 못했다. 강제 이주로 잃어버린 명예와 복지 혜택을 되찾기 위해 이들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의 법정에서 힘겨운 복권(復權) 투쟁을 벌이고 있다. 10만 명이 넘는 이들 고려인은 나아가 사회주의 해체 이후 CIS 각국에서 유행병처럼 번진 민족적 차별에 맞서 거주지를 옮기거나 일자리를 찾으며 새로운 도전을 헤쳐 나가고 있다.》

‘명예-복지 되찾기’ 러-카자흐서 잇단 법정소송

절차 까다롭고 시간 걸려 수혜자 10% 밑돌아

무국적 - 불법체류 5만명 신청 자격조차 없어

▽멀고 까다롭기만 한 복권의 길=1937년 10월 시베리아 횡단열차 화물칸에서 태어난 비네라 이(여) 씨는 지난해 말까지 모스크바 법원을 10차례 이상 드나들었다.

이 씨는 2002년 모스크바 주에 정착한 뒤 연금과 의료 혜택을 받을 조건을 갖췄다. 그러나 러시아 공무원들은 “강제 이주자 가족은 러시아 여권이 있어도 사회복지 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정치적 탄압 희생자의 복권에 관한 특별법’이 있어 강제 이주자가 법원 판결에 의해 복권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던 이 씨는 이 법을 알게 된 뒤 곧바로 잃은 권리를 되찾기로 결심했다.

9일 모스크바 동부 타간스키 법원 앞에서 만난 고려인 오가료프 문(73) 씨도 “강제 이주자라는 낙인을 후손에게 남기고 싶지 않아 법정 투쟁을 통해 권리를 회복하기로 결심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러시아에 남아 있는 고려인들은 “복권 절차가 까다롭기 때문에 법률 지식이 부족한 개인이 해결하기에는 벅찬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강제 이주자 후손들은 부모나 할아버지가 강제 이주 조치를 받았다는 사실을 문서로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오랜 이주 생활과 잦은 이사를 겪은 강제 이주자 후손들이 이런 문서를 갖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문 씨는 “사회주의 시절에 관청에 문서를 제출한 적이 있는 고려인들은 문서 찾기가 쉬운 편이지만 대다수는 러시아연방보안국(FSB) 문서고를 새로 뒤지며 가족의 이름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고려인들이 서류를 찾아내도 러시아 경찰과 법원에서 강제 이주 증명서를 받아낼 때 다시 장애물에 부닥친다. 모스크바 남부 체료무시킨 법원 앞에서 만난 빅토르 최(41) 씨는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려 나섰지만 경찰들이 증명서를 떼 주지 않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다녀왔다”고 말했다.

문 씨는 “경찰 증명서를 갖고 법원에 복권 심판 신청을 낸 이후 판결이 나오기까지 3년이 걸린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복권까지 갈 길이 멀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모스크바에서 고려인 복권을 돕고 있는 고려인 변호사 이고리 최 씨는 “50만 명이 넘는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에 따른 후유증을 빨리 털어내려 하지만 복권 제도가 완비된 모스크바에서도 고려인 복권 수혜자는 10%를 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해 말 복권 판결로 연금과 휴양소 시설 이용 혜택을 받게 된 비네라 이 씨는 “러시아에 살고 있는 우리 가족은 다른 곳에 살고 있는 고려인에 비해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CIS 국가 중 고려인 복권 절차를 법으로 마련한 곳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뿐이다.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 등 사회주의 붕괴 이후 소련에서 분리 독립한 나라 대부분은 복권 절차 자체가 없다.

▽되살아난 차별=지난달 31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고려인 야코프 박 씨가 승용차에서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우즈베키스탄 국적인 박 씨는 아내와 어린아이 세 명을 데리고 일자리를 찾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했다.

박 씨가 숨진 차량 앞 유리에는 러시아 스킨헤드의 상징 기호인 스와스티카(卍)가 그려져 있었다. 러시아 스킨헤드는 이주자를 무차별 폭행하는 범죄 집단이다.

박 씨와 같은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은 1990년대 분리 독립 운동이 기승을 부릴 때 이민족이라는 이유로 대부분 일자리를 뺏긴 경험이 있다. 이들은 국내 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등지를 떠돌고 있다. 그렇지만 새 정착지에서도 인종차별 집단의 공격을 받는 등 강제 이주 1세대의 고난을 그대로 이어받아 생활하고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유랑 생활을 하는 젊은 고려인들 중에는 부모 세대가 강제 이주 당시 서류를 잃어버려 무국적자로 생활하거나 불법체류자가 된 사람도 많다. 일부 전문가들은 고려인 무국적자나 불법체류자가 5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한다.

이고리 최 변호사는 “무국적자나 불법체류자는 복권 신청 자격이 없을뿐더러 당국에 적발되면 곧바로 강제 출국된다”며 “강제 이주 세대가 지금까지 소수민족으로 온갖 고통을 다 겪었지만 보상은 물론 명예도 회복하지 못했고 그들이 받은 차별은 이제 후손들에게까지 돌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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