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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는 美와, 돈은 南에서

입력 2007-08-10 03:06수정 2009-09-26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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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논의 역사로 본 北전략

1990년대 들어 시작된 북핵 문제와 이에 따른 한반도 비핵화 논의는 주로 북한과 미국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북한이 자신들의 핵 개발로 일어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남한을 철저히 배제하고 미국과 직거래를 하는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을 고수해 왔기 때문.

이는 북한이 미국과의 대결 및 대립 구도를 깨고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핵심 카드’로 핵 개발을 선택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핵 개발로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평화에 위기감을 조성한 뒤 미국과의 직접 협상을 통해 경제 지원이나 안전 보장 등을 얻어내려 했다는 것.

북한의 이런 속마음은 1992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북핵 사찰로 시작된 ‘1차 북핵 위기’의 해결 과정에서도 잘 나타난다. 당시 IAEA는 북한이 신고한 플루토늄의 양이 사찰 결과와 차이가 나는 것을 문제 삼아 영변 핵단지에 있는 2개의 미신고 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했다. 하지만 북한은 이를 거부하고 1993년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면서 북-미 관계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위기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후 북한과 미국은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고 1994년 9∼10월 제네바 합의를 통해 이 문제를 매듭지었다. 당시 미국은 북한이 핵을 동결하는 대신 북한에 경수로 발전소를 지어주고 연간 50만 t 상당의 중유를 지원키로 했다.

제네바 합의 이후 잠잠하던 북-미 관계는 경수로 건설 지연으로 북-미 관계 정상화가 늦어지면서 다시 삐걱거리더니 1998년 북한의 금창리 지하 핵시설 의혹이 불거지고 같은 해 8월 북한이 대포동 1호 미사일을 쏘면서 급격히 악화됐다.

1999년 이 문제를 풀기 위한 북-미 미사일 협상이 시작돼 같은 해 9월 북한이 미사일 발사 유예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당시에도 미국은 북한에 경제 제재 완화를 약속했다.

북한은 2000년대 들어서도 미국을 북핵 문제 해결의 유일한 당사자로 지목해 ‘북-미 양자회담’을 고집해 왔다. 반면 미국은 남한과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이 함께 논의하는 ‘다자(多者)회담’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을 주장했다.

북한과 미국이 팽팽히 맞서면서 평행선을 긋던 북핵 문제 논의 축은 2003년 7월 당시 중국 다이빙궈(戴秉國) 외교부 수석부부장이 북한과 미국을 방문해 다자회담을 중재하는 데 성공하면서 6자회담의 틀 안으로 들어왔다.

2003년 8월 시작된 6자회담은 올해 3월까지 6차례 열리는 동안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담은 9·19공동성명과 이를 이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2·13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972년 7·4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 문제는 ‘민족끼리’, 군사 문제는 미국과의 직접 협상을 고집해 온 북한은 경제협력 문제는 남한을 주요 논의 대상으로 삼는 분리정책을 펴고 있다. 핵이나 안보 문제는 미국과, 경제 문제는 남한과 각각 ‘협상’한다는 것.

2000년 제1차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주로 경제협력 문제 등만 논의됐다.

이상록 기자 myzodan@donga.com

▼북한 핵 관련 주요 일지▼

△1992년 5월=국제원자력기구(IAEA) 북한 핵 사찰

△1993년 3월=북한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1994년 9∼10월=북-미 제네바 합의

△1998년 8월=북한 대포동 1호 미사일 발사

△1999년 9월=북-미 미사일 협상에 따라 북한 미사일 발사 유예 선언

△2001년 10월=미국, 북한 테러지원국 지정

△2003년 4월=북핵 관련 북-미-중 3자회담

△2003년 8월=북핵 관련 6자회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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