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포커스/박철희]강경외교 포기가 아베 탈출구

  • 입력 2007년 8월 10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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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9일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은 고작 37석을 얻는 데 그치면서 1955년 이후 처음으로 참의원 제1당 자리를 야당에 내줬다. 연립여당인 공명당 의석을 합쳐도 과반수에 못 미치는 사상 초유의 역사적 참패였다.

아베 총리는 총리직을 내놓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베 정권은 중의원에서는 압도적 다수를 유지하면서도 참의원에서는 과반수를 채우지 못하는 절름발이 정권으로 다시 서게 됐다.

참의원에서 민주당이 주도권을 가짐에 따라 야당은 심의를 거부할 수 있고, 법안 심의만 계속 해서 산 채로 죽일 수 있으며, 부결시켜 중의원으로 되돌려 보낼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참의원에서 향후 3년간 야당 민주당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참의원의 문턱에서 아베 노선이 사사건건 시험대에 서게 될 것이다.

물론 참의원에서의 야당 약진이 자민당 정권 자체의 고사(枯死)는 아니다. 중의원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한 아베 정권은 물론 자민당 정권은 지속된다. 야당이 승리했으니까 일본의 대외 노선이 유화적이고 리버럴하게 급선회할 것이라는 기대도 섣부르다. 제1야당인 민주당은 자민당과 이데올로기적인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중도보수 정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베 정권의 진로는 청신호를 찾아보기 힘든 가시밭길이다. 자민당 내에서는 선거 참패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죽은 듯하다가도 망령처럼 다시 살아날 것이다. ‘선거의 얼굴’로 기대했던 아베 총리의 위상은 유명무실해졌다. 그가 총리직을 지킬 수 있는 이유는 당내에 대안이 없어서다.

좋든 싫든 아베 총리는 자신의 정치 노선을 전환하거나 수정해야 할 압박에 직면했다. 그는 취임 이후 헌법 개정, 교육개혁, 방위성 승격 등 이데올로기의 정치를 우선해 왔다. 생활정치, 지방정치에 대한 무시가 자민당에 대한 유권자의 이반을 부추겼다.

그의 외교전선에도 제동이 걸릴 게 확실하다. 헌법 개정의 구체안 마련은 3년간 유예되어 있지만 헌법 개정을 위한 정치적 동력은 약해질 것이다. 야당의 의견을 수용하는 방향으로의 타협이 불가피하다.

11월 1일로 시한에 걸린 테러대책 특별조치법은 민주당 당수인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가 공개로 반대 의사를 밝힘에 따라 시한 연장이 불투명하다. 민주당 의원이 모두 같은 의견은 아니지만 아베 정권이 민주당을 무시하고 시한을 연장하거나 강행 통과시킬 수는 없다.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 문제는 연립여당인 공명당이 반발하는 데다 야당인 민주당이 거세게 저항할 것이 분명하므로 보고서를 넘어선 실질적 정책화는 여의치 않다. 북한 문제는 북한이 응해 주지 않는 납치 문제를 아베 정권이 핵심 과제로 하고 있어 칼자루를 북한이 쥐는 격이 되어 버렸다.

위안부 발언 등으로 강경 이미지를 심은 아베 총리는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서먹해진 면이 있다. 역으로 아베 정권은 아시아를 자극하는 강경외교로 나서기 어렵다. 야당에 공격의 빌미만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베 정권은 내정과 외교 양면에서 진퇴양난의 위기다. 자신의 노선을 바꿀 경우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와 지지율이 하락하겠지만 국민을 안심시키는 정책, 생활을 향상시키는 개혁 추진, 국회에서 야당과 타협, 그리고 유연한 대외노선 추구가 없는 한 장기 정권의 길은 열리지 않는다.

야당과 타협하면서도 주민 생활과 직결된 구체적 어젠다로 국민을 설득하는 모습을 통해 ‘개혁적 총리’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지, 그리고 미일동맹을 강화하면서도 아시아 국가와 신뢰에 기반을 둔 친선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지가 그의 정치적 생명을 좌우할 것이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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