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단원 닮은 꼴이 상상력 불 붙였죠”

  • 입력 2007년 8월 10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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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바람의 화원’을 낸 이정명 작가. 그는 “전형적인 장르 소설의 장치를 사용했지만 그 속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신작 ‘바람의 화원’을 낸 이정명 작가. 그는 “전형적인 장르 소설의 장치를 사용했지만 그 속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김홍도의 ‘빨래터’(위)와 신윤복의 ‘계변가화’. 그림의 풍정은 닮았으나 화원의 개성은 다르다.
김홍도의 ‘빨래터’(위)와 신윤복의 ‘계변가화’. 그림의 풍정은 닮았으나 화원의 개성은 다르다.
신작 ‘바람의 화원’ 펴낸 소설가 이정명 씨

혜원 신윤복(1758∼?)의 그림 ‘계변가화(溪邊佳話)’와 단원 김홍도(1745∼?)의 ‘빨래터’에서 방망이질하고 빨래를 널고 머리를 감는 개울가 여인들은 놀랄 만큼 비슷하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화풍은 달랐던 두 사람이 서로 거의 ‘표절’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정명(42) 씨의 ‘바람의 화원’(밀리언하우스)은 이 ‘닮은꼴’ 그림에 상상력을 불어넣은 소설이다.

이 씨는 지난해 소설 ‘뿌리 깊은 나무’로 호응을 얻은 작가다. 훈민정음 반포 7일 전 집현전 학사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이 책은 35만 부 이상 팔리면서 ‘한국형 팩션’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국내 대중소설 하면 ‘헐거운 형식에 통속적인 내용’으로만 여겨졌지만 ‘뿌리 깊은 나무’는 밀도 있는 구조와 완성도로 지지를 받았다. 신작 ‘바람의 화원’도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입힌 작품으로, 전작에 이어 한국형 팩션 바람을 이어갈 참이다.

9일 만난 이 씨는 “가까운 사람을 빼면 지인들도 내가 소설을 쓰는 줄 모른다”고 말했다. ‘뿌리 깊은 나무’가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매체 인터뷰나 사인회 한번 하지 않을 만큼 사람 만나는 게 부담스러웠다는 것이다. 애초 서면 인터뷰를 고집했던 그는 “신작을 내면서 ‘이렇게 꺼리는 것은 무례’라는 생각에 마음먹고 나섰다”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바람의 화원’에서 이 씨가 주목한 것은 혜원의 삶. 혜원에 대한 기록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나오는 ‘신윤복. 호 혜원(蕙園), 부친은 첨사(僉使) 신한평(申漢枰). 화원(畵員). 벼슬은 첨사다. 풍속화를 잘 그렸다’가 전부다. 작가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화원이 어떻게 이처럼 빈약한 사실(史實)로만 남겨졌는지를 소설화한다. 천재였지만 뜻대로 살 수 없었던 혜원과 최고의 지위를 누렸으나 혜원의 출현에 혼란을 겪는 단원의 갈등이, 화원의 살인 사건을 큰 줄거리삼아 펼쳐진다. 여기에 고뇌하는 젊은 왕 정조, 야심으로 가득 찬 혜원의 부친 신한평 등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아리랑’이란 담뱃갑에 혜원의 단오풍정(端午風情) 중 그네 타는 여인의 그림이 있었지요. 단원과 혜원 두 사람의 우물가와 빨래터 그림은 식당에도 붙어 있고 달력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어느 날 비슷한 그림이 있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때부터 강명관 오주석 정종미 씨 등 연구자들의 저서로 공부를 했어요. 두 사람의 화풍은 달랐지만 표현한 인물의 내면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씨는 ‘한국형 팩션 작가’라는 평에 편치 않은 표정이었다. “굳이 이 장르를 고집한 게 아니라 그때 구상한 작품이 역사를 소재로 한 것이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삼국시대 남녀의 러브스토리를 그린 ‘천년 후에’,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기러기 아빠의 이야기 ‘마지막 소풍’ 등 대중의 감성에 호소하는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런 작품만 쓰다간 인생을 소진한다는 느낌에” 다니던 잡지사에 사표를 던지고 나와 작심하고 쓴 소설이 ‘뿌리 깊은 나무’다. 등단할 생각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등단은 전투를 하듯 글을 써야 하는 고행인데, 그럴 용기도 재주도 없었다”며 “순수문학의 길을 걷는 작가들께는 송구스럽지만 내게 글쓰기는 즐거운 놀이”라고 말했다.

‘바람의 화원’에 대해서도 그는 “내 책보다 훨씬 수준 높은 연구서와 평전이 많은데 나는 이야기 속에 특별한 메시지를 담기보다 스스로 즐기기 위한 방편으로 쓴 것”이라며 “책을 읽는 시간만큼은 독자들이 즐겁고 재미있기 바란다”고 말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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