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자비]느림의 찬양

  • 입력 2007년 8월 9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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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교 1학년 때 동창들이 겨우 몇 대 가지고 있던 것은 수동 타자기가 전부였다. 2학년이 되자 전동 타자기가 등장했고, 3학년 때에는 컴퓨터가 간간이 눈에 띄더니 대학원에 와서는 신학교 기숙사 각 방 모든 신학생이 개인 컴퓨터를 소유하게 됐다. 나는 그야말로 컴퓨터와 그에 따른 인터넷 정보의 격동기를 살아온 셈이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컴맹이며, TV와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 원시인이다. 컴퓨터의 등장 이후 생활의 모든 것이 편리해졌고 빨라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저마다의 입에서는 바쁘다는 말만 늘어가는 것 같다. 모두가 한결같이 되풀이하는 말은, 이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컴퓨터와 인터넷의 정보에 밝아야 하고 더욱 민첩하게 적응해야 한다는 이론뿐이었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원격조종당하는 로봇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섬뜩함이 느껴진다.

분명 인류 역사는 반동의 역사였다. 어느 한 이념이, 문화와 과학이 전부였던 때는 결코 없었다. 중세 신(神) 중심의 문화와 신앙이 전부였던 때에도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는 싹을 틔웠다. 마찬가지로 다가오는 미래에는 기계문명과 정보화 시대에 염증을 느껴 인간 정신의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선각자들이 등장할 것이고, 조금씩 그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서점엘 가면 ‘느리게 살기’라든가, 명상에 관한 책들, 잠시 멈춤을 가르치는 지혜의 책이 즐비하다.

컴퓨터가 없었던 시대인 1930년대 ‘게으름의 찬양’을 외쳤던 자크 르클레르크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데카르트가 자신의 행로를 좌우할 예언적 꿈을 꾼 것도 무위도식 상태에서였고, 뉴턴은 나무 밑에,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 안에 각각 드러누운 상태에서 큰 꿈을 꾸었다. 그리고 플라톤이 아카데모스 정원에서 벗들과 더불어 사색을 한 일도 우리 시대가 말하는 소위 맹렬한 생활 따위는 결코 아니었다. 그의 ‘대화’를 보아도 하나같이 한가로운 이야기들뿐이다.”

모두가 바쁘다며 기계에 얽매여 있을 때, 자연과 사색 속에서 진정 가치 있는 열매를 따는 삶도 때론 필요하지 않을까.

배광하 신부·겟세마니 피정의 집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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