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91년 英기자 존 매카시 석방

  • 입력 2007년 8월 8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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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갇혀 있는 동료 인질의 석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를 지탱해 준 건 그들이었다.”

1991년 8월 8일 존 매카시는 꿈에 그리던 고국, 영국 땅을 다시 밟으며 이렇게 말했다. 레바논에서 이슬람 테러조직에 납치된 지 1943일 만이었다.

월드 와이드 텔레비전 뉴스 초년병 기자 존이 베이루트에 파견된 것은 1986년 4월. 당시 레바논은 10년 넘게 내전 중이었다. 기독교 성향의 정부가 서방의 비호를 받는다고 믿은 이슬람 반군은 전략적으로 서양인을 납치했다.

인질로 잡혀 있던 영국인 세 명이 베이루트 거리에서 시체로 발견된 날, 존은 네 번째 영국인 인질이 되었다. 5주간 취재를 마치고 귀국 비행기를 타러 가던 길이었다.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목청을 울려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미라처럼 온몸이 테이프로 꽁꽁 묶여 있었다. 어둠은 빈틈이 없었고 확신할 수 있는 건 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구타와 폭염, 살해 협박에 익숙해지자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영원할 것 같은 독방의 무료함. “책을 빼앗긴 뒤 난 내 안에 있는 것만으로 생존해야 했다. 기억은 식량과 같았다. 과거의 일을 수없이 떠올려내고 또 삼켰다.”

불행 중 다행일까. 존은 절망의 문턱을 함께 넘을 동지를 만났다. 또 다른 인질 브라이언 킨난. 존이 납치되기 며칠 전 실종사실을 보도한 북아일랜드 청년이었다. 같은 쇠사슬에 묶여 4년간 동고동락했던 그들의 고군분투는 2003년 ‘어두운 비행(Blind Flight)’이란 영화로 제작됐다.

1990년 10월 레바논 정부군은 시리아군의 도움으로 통제력을 회복했다. 존과 브라이언은 레바논 정부와 유엔의 합의에 따라 함께 풀려났다.

존은 과거의 악몽에 굴복하지 않았다. 8년 만에 다시 레바논을 찾아 시아파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만들었다. 그들이 납치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존은 영국과 오랜 갈등을 빚어온 북아일랜드를 브라이언과 함께 순례하기도 했다. 그때의 기록이 ‘길 위의 유령(A Ghost Upon Your Path, 2002년)’이란 책이다. 그 속에는 대영제국주의가 강요한 무고한 이들의 고통이 담겨 있다.

존은 “인간성이 파괴되는 현장에서 비로소 인간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에게 ‘1943일’은 끔찍했지만 새로운 사실에 눈뜬 각성의 시간이기도 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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