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연욱]金법무의 퇴진이후

  • 입력 2007년 8월 7일 19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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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1

김대중(DJ) 정부 임기 말인 2002년 5월. DJ의 차남인 홍업 씨를 상대로 한 검찰 수사가 막바지로 치달았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송정호 법무부 장관에게 홍업 씨의 불구속을 ‘부탁’했다. 홍걸 씨에 이어 홍업 씨까지 구속하는 것은 너무 하지 않느냐고 했다. DJ의 뜻을 은밀하게 송 장관에게 전한 것이다.

그러나 송 장관은 청와대의 ‘부탁’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결국 그는 장관 취임 6개월 만에 옷을 벗는 단명에 그쳤다.

##장면2

김영삼(YS) 정부 임기 말인 1997년. 그해 6월 YS의 차남 현철 씨가 검찰에 구속됐다. 최상엽 법무부 장관이 청와대로 불려갔다.

YS는 최 장관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최 장관이 현철 씨 구속 배경을 설명하려 했으나 YS는 “알았다. 그만 가라”고 물리쳤다.

당시 최 장관은 대통령의 기세에 질려 사표를 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해 3월 취임한 그는 8월 개각 때 경질됐다.

김성호 법무부 장관이 6일 끝내 사의를 표명했다. 대선을 불과 4개월 남겨둔 시점이다. 그 뒤안길에서 YS, DJ 정부 임기 말 법무부 장관의 퇴장 장면이 떠올랐다.

김 장관은 “청와대와의 갈등은 없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그의 ‘강한’ 부인은 갈등이 소문만이 아니었음을 오히려 확인해주는 듯했다. 여야 대치 정국이 계속되면서 김 장관과 청와대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올해 초 노무현 대통령이 개헌 드라이브에 시동을 걸었을 때도 “개헌의 주무부서인 법무부의 반응이 미온적이다”며 김 장관에게 화살을 돌렸다.

취임 초부터 김 장관이 쏟아낸 친(親)기업적 발언도 그랬지만 6월 국회 대정부 질문 답변은 청와대의 ‘인계철선’을 건드렸다. 김 장관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노 대통령의 발언을 문제 삼은) 선거법 제9조 ‘공무원의 선거중립 의무’ 규정은 위헌이 아니다”라고 답한 것은 “이 조항은 위헌”이라는 노 대통령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 김 장관의 ‘소신 발언’으로 평가할 만하다.

역대 정권의 임기 말마다 법무부 장관이 수난을 겪는 일이 되풀이된다. 권력을 쥔 청와대의 뜻과 ‘법과 원칙’이라는 본연의 가치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인사권을 쥔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면서 버틴다는 것은 우리의 풍토에선 정말 힘든 일이다. 김 장관의 퇴진을 지켜본 검사들은 “특별수사로 잔뼈가 굵어 뱃심 좋은 김 장관도…. 역시 임명권자인 대통령이 무섭다”라고 탄식했다.

1973년 미국에선 법무부 장관과 부장관이 동반 퇴진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특별검사를 해임하라는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미국 언론은 이 사건을 ‘토요일 밤의 대학살(Saturday night massacre)’이라고 불렀다. ‘대학살’의 상흔은 깊었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탄핵의 벼랑 끝에서 결국 스스로 물러났다.

2002년 당시 송 장관의 ‘경질’은 역설적으로 검찰 독립을 한걸음 진전시켰다는 평가도 있다. 그는 이임식에서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싸워서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내줄 수는 없다)’이라는,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의 말을 인용했다.

김 장관의 퇴진 이후를 주목하는 이유다.

정연욱 사회부 차장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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