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승호]백두산호텔 꼴을 안 당하려면

  • 입력 2007년 8월 5일 19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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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에서 온천별장호텔을 운영하던 박범용(53) 사장은 요즘 억장이 무너진다. 중국 지린(吉林) 성 산하 창바이산(長白山)보호개발구관리위원회가 지난달 31일부터 중장비를 동원해 5일 이 호텔을 완전 철거했기 때문이다. 백두산 매표소 안에는 5개의 호텔이 있는데 한국인, 북한 국적의 재일교포, 중국 국적의 조선족 등 한국계가 이것들을 소유하고 있다. 지금은 호텔 하나만 손댔지만 나머지도 같은 운명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지린 성 정부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백두산에 관광호텔을 적극 유치하면서 15∼45년 운영 기간을 보장했다. 1992년 체결된 한중(韓中)투자보장협정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장백산관리위는 이를 무시한 채 작년 9월 5개 호텔에 대해 철거 방침을 통보했다. 지린 성의 방침이 알려지자 우리 정부가 재고(再考)를 요청했고 호텔 투자자들도 중국 중앙정부 상무부와 지린 성 상무청 외국인투자기업고발처에 진정서를 냈다. 아직 상무부의 검토 결과도 안 나왔는데 장백산관리위가 일방적으로 철거를 집행한 것이다.

장백산관리위가 내세운 철거 명분은 ‘백두산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넣기 위해서’란다. 관리위의 설명에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지만 관리위의 진짜 속셈이 무엇이든 중국 정부의 약속을 믿고 막대한 투자를 한 한국인들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물론 투자자들이 중국 정부나 지방정부를 상대로 제소할 수 있다. 그러면 중국 법정에서 다퉈야 한다. 문제는 외국인 투자자가 중국 법정에서 중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해 이기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투자자-국가 간 소송제도(ISD)’이다.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외국인 투자자가 손해를 볼 경우 해당국 법원이 아니라 국제투자분쟁중재센터(ICSID)에 조정을 요청할 수 있게 하고 해당국 정부는 그 조정 결과를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우리가 각국과 맺고 있는 80여 개의 투자보장협정에도 이 제도가 도입돼 있다. 한-칠레, 한-싱가포르 자유무역협정(FTA)에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15년 전에 맺은 중국과의 투자보장협정에는 이 조항이 없었고 그것이 화근이 됐다.

최근 타결된 한미 FTA에도 물론 이 조항이 있다. 그런데 한미 FTA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건 중요한 쟁점이 이 조항이다. “이는 정책 주권을 미국에 양도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부가 약속을 안 지켜 외국인 투자자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보상 또는 배상을 해 줘야 한다. 외국인뿐 아니라 내국인에게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이것이 정부의 신뢰성이며 정책의 투명성, 예측가능성이다. 선진화의 핵심 증표이기도 하다. 이게 왜 주권 침해인지, 유독 미국과 이 약속을 교환하면 주권이 침해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백두산에서 우리가 당한 일을 한국 정부나 서울시도 서슴지 않고 저지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현대자동차 등 우리 기업들도 외국에 많이 투자하고 있다. 외국 정부에 “한국 기업을 제대로 보호해 달라”고 요구하려면 한국에 온 외국 기업에도 같은 약속을 해 줘야 한다. 그래야 백두산호텔 꼴을 다시 안 당한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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