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사무친 귀향살이…‘유배객, 세상을 알다’

  • 입력 2007년 8월 4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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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객, 세상을 알다/김려 지음·강혜선 옮김/306쪽·1만 원·태학사

《그의 글은 연못과 같다.

한참을 읽다 보면 호기심 많고 잔정도 많지만 어딘가 한구석이 비어 있어 꼭 채워 주고 싶은 그런 인간미 가득한 사내의 풍모가 어리기 때문이다. 국토 최북단의 심산유곡과 최남단 바닷가를 오가며 꼬박 십 년 세월을 억울한 귀양살이로 보낸 조선 선비 김려(1766∼1822)라는 사내다.》

이 사내의 삶, 가문 좋고 문장 좋고 교유관계 좋기로는 훗날 고속 출세하는 동문수학 친구 김조순(1765∼1832)을 빼닮았건만 어째 억세게 운 없기론 다산 정약용(1762∼1836)을 더 닮았다. 32세의 나이에 서학을 논한 친구의 옥사에 억울하게 연루돼 함경도 유배형에 처해진다. 마침 병든 아내가 막내를 해산한 날 아기 얼굴도 못 보고 엄동설한을 헤치고 ‘하늘 끝’으로 유배를 떠나는 심정이 오죽할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평생 도리에 어긋나는 행실이 없었는데 갑자기 이런 변을 당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허공에 떨어진 듯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아득한 저 푸른 하늘이여, 어찌 내게 이다지도 모질게 구는가.”

한겨울 거센 여울을 건너다 투신자살을 기도하고, 혹독한 추위에 피를 토하거나 혼절하며 펑펑 눈물 흘리던 이 사내 참으로 엉뚱하다. 구금 중에 목격한 살인미수 사건을 흥미진진하게 추적하는가 하면 유배 길에 만난 일출의 황홀경에 넋이 빠진다. 유배지 부령에선 연희라는 기생과 사랑에 빠지는가 하면 동네 코흘리개 아이들 훈장 선생이 돼 주고 신분 낮은 아전들과 술친구가 된다.

3년 뒤 신유박해 때 그토록 그리던 한양으로 돌아오지만 혹독한 고문만 받고 이번엔 경상도 진해로 7년의 귀양살이를 떠난다. 그 따뜻한 남쪽 바다에선 북쪽 부령이 그리워 유배지 셋방 창에 ‘생각하는 창’이란 뜻의 사유(思유)란 이름을 붙이고 ‘사유악부’라는 절절한 연작시를 남긴다.

‘그대 어디를 그리워하나/그리운 저 북쪽 바닷가’로 시작하는 이 연작시엔 정겨운 사람 내음이 물씬하다. 여름 장마에 개울이 넘쳐 며칠 못 본 연희를 만나러 나선 길에 작은 우산 들고 치마 끌며 다리를 건너오는 그녀를 발견할 때의 기쁨, 북풍한설 찢어진 문풍지 소리로 외로움이 사무칠 때 찾아와 손수 데운 술을 따라 주며 노래를 불러 주던 연희에 대한 애틋함은 현대 연가 뺨치게 아름답다.

또한 그가 쓴 한국 최초의 어류백과사전 ‘우해이어보’에는 짠 내 물씬한 어부들의 삶에 밀착한 해학이 가득하고, ‘한고관외사’라는 야담집에는 서인(庶人), 궁녀, 거지, 광인처럼 소외된 삶에 대한 애정이 넘쳐난다. 리얼리즘과 휴머니즘이 결합한 그의 글을 통해 따스한 심장 하나로 각박한 세상을 데우려 한 조선의 진정한 ‘훈남’을 만날 수 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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