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좋은 ‘일자리 30만개’… 저임-단순직 늘어

  • 입력 2007년 8월 3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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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단순 노무와 영세한 서비스직 등 질이 낮은 일자리가 늘고 있다. 반면 20, 30대 취업자와 제조업의 일자리는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한 대학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에서 대학생들이 지원서를 작성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최근 단순 노무와 영세한 서비스직 등 질이 낮은 일자리가 늘고 있다. 반면 20, 30대 취업자와 제조업의 일자리는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한 대학에서 열린 취업박람회에서 대학생들이 지원서를 작성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중견 섬유회사의 임원으로 일하다 2년 전 회사를 그만둔 이모(55) 씨. 중소기업 임원으로 재취업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헤드헌팅 업체에 이력서를 넣었다. 그동안 몇 차례 면접을 봤지만 기업들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를 외면했다.

연로한 부모의 생활비까지 책임져야 했던 이 씨는 결국 월급 100만 원이 채 안 되는 빌딩 경비원으로 취직했다. 그는 “그나마 이런 일자리라도 구해서 다행”이라며 “동료 경비원 중에도 비슷한 처지의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라고 귀띔했다.

일자리의 질(質)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 최근 고용동향을 보면 매년 30만 개 정도의 일자리가 늘고 있지만 질이 낮은 일자리 위주로 늘어나는 현상이 뚜렷하다.

대기업 사무직으로 일하던 근로자들은 단순노무직으로 밀려나고 있다. 20, 30대 젊은층 취업자는 갈수록 줄어드는 반면 40대 이상 고령층 취업자는 꾸준히 늘면서 일자리의 활력도 떨어지고 있다.

제조업의 일자리는 계속 줄어들고 질이 낮은 서비스업 일자리가 이를 대체하는 양상도 두드러진다.

중소 제조업체에서 생산직으로 일하던 정모(48) 씨는 지난해 말 경영사정이 악화된 회사가 생산직 근로자를 10% 감원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정 씨는 올해 들어 중소기업 10곳의 문을 두드렸지만 재취업에 실패했다. 그는 결국 두 달 전부터 건물 공사장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정 씨처럼 기술직이나 사무직으로 일하다가 직장을 잃고 재취업에 나선 사람들이 경력이나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는 단순노무직으로 전락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0년 초 199만 명 수준이던 단순노무직 취업자는 올해 6월 283만 명으로 증가했다.

단순노무직에 종사하는 취업자 수는 고령층으로 갈수록 급증하는 추세다. 올해 5월 현재 55세 이상 79세 이하 고령층 가운데 단순노무직 종사자는 101만7000명으로 처음으로 100만 명을 넘어섰다.

소득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임시직과 일용직, 시간제 근로자가 크게 늘어난 것도 눈에 띈다. 임시·일용직 취업자 수는 1995년 540만 명에서 2000년 696만 명, 지난해 734만 명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최경수 연구위원은 “경제구조가 노동과 자본 중심에서 지식 중심으로 바뀌면서 사무직 등 중간 수준의 일자리는 줄어들고 지식 경제를 활용하는 고(高)숙련 직종과 단순노무직으로 양극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작은 화장품 가게를 운영하던 송모(43·여) 씨는 지난해 가게 문을 닫았다. 대형 화장품전문점 등에 손님을 뺏기면서 직원까지 내보냈지만 매달 쌓이는 적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업종을 바꿔 다시 창업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건물 임대료가 너무 올라 포기했다.

송 씨는 지난달부터 파출부로 일하면서 월 80만 원 정도를 벌어 가족의 생계를 꾸려 가고 있다.

서비스업에서 일자리가 늘어나긴 했지만 대부분 단순직이어서 전체 일자리의 질을 낮추는 원인이 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이병희 선임연구위원은 “서비스업 고용이 연구개발(R&D) 등 고임금 일자리보다 근로파견업, 운수업 등 저임의 질 낮은 일자리 위주로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한상공회의소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일자리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9년 27.8%로 최고점에 오른 뒤 하락세로 돌아서 지난해 18%로 줄었다. 반면 서비스업 비중은 1980년 37%에서 1990년 46.7%로 높아진 뒤 지난해엔 66.3%로 치솟았다.

문제는 서비스업 생산성 수준이 제조업에 비해 크게 떨어지면서 서비스업의 확대가 전체 일자리의 질을 낮출 뿐 아니라 성장률까지 잠식하고 있다는 점.

노동연구원의 허재준 선임연구위원은 “국내 서비스업의 부가가치는 제조업의 60% 수준”이라며 “서비스업 고용 비중이 빠르게 커지고 있지만 서비스업 부가가치 수준은 여전히 낮아 양질의 제조업 일자리가 질이 낮은 서비스 일자리로 대체되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올해 초 졸업 예정이던 대학생 이모(27) 씨는 일부러 졸업을 1년 늦췄다. 1년간 학교를 더 다니면서 공기업 취업을 준비하기로 한 것.

이 씨는 “대부분 졸업 전에 취업이 안 되면 졸업을 미루고 취업 공부를 한다”며 “그래도 직장을 잡지 못하면 졸업한 뒤 1년 정도 취업 준비를 더 하다가 비교적 나이 제한이 엄격하지 않은 7급,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는 선배들이 많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20, 30대 취업자 수가 갈수록 줄고 50, 60대 취업자는 늘면서 일자리의 활력도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고령층은 일하고 싶은 욕구를 되살려 활발한 구직활동을 하고 있지만 젊은층은 계속된 취업난으로 대학 졸업을 늦추거나 졸업을 하고도 취업 준비에 매달리는 실정이다.

20∼39세 취업자 수는 지난해 말 현재 1013만9000명으로 2000년 말에 비해 50만 명이 감소한 반면 50세 이상 취업자 수는 624만2000명으로 2000년 말 대비 160만 명이나 늘었다.

청년(15∼29세) 실업률은 올해 들어 7%대를 유지하고 있지만 비(非)경제활동인구에 포함돼 실업자로 잡히지 않은 취업준비생들을 포함하면 실제 청년 실업률은 2배 이상으로 늘어난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LG경제연구원 오문석 상무는 “전체 실업률은 3%대의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고용시장을 분석해 보면 일자리의 질이 크게 낮아지고 있다”며 “이제는 일자리의 양 못지않게 질적인 측면을 고려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임수 기자 imsoo@donga.com

유재동 기자 jarrett@donga.com

신치영 기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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