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심규선]일본 유권자도 무서울 때가 있다

  • 입력 2007년 8월 2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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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일본 참의원 선거의 개표가 끝난 뒤 아사히닷컴에 이런 기사가 올라왔다.

‘신 우정족의 대부, 가타야마 씨 낙선으로 통신·방송업계에 파문.’ 기사를 요약하면 이렇다. 그동안 통신과 방송업계의 방파제 역할을 해 주던 자민당의 가타야마 씨가 낙선함으로써 통신과 방송업계는 업체 분할, 규제 강화, 수신료 인하 등을 요구하는 정부의 개혁 공세를 어떻게 막을지 전전긍긍하고 있다. 한마디로 업계가 쇼크를 받았다는 것이다.

기존 룰 철저히 뒤엎은 투표성향

가타야마 도라노스케. 그는 자민당의 참의원 선거를 지휘한 간사장(사무총장)이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이 낙선하는 바람에 자민당 참패의 상징이 됐다. 역으로 거물들을 쓰러뜨리고 참의원의 제1당으로 도약한 민주당의 승리는 더욱 빛났다. 자민당이 참의원에서 제1당의 지위를 잃은 것은 1955년 창당 이후 처음. 일본 언론들이 선거 결과를 전하며 ‘자민, 역사적 참패’라고 한 이유다.

일본의 지인들은 한국 정치에 대해 ‘드라마틱하다’는 말을 많이 한다. 한국에 비해 일본 정치는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자민당이 단독이든, 연립이든 거의 50년간 정권을 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정치와 일본정치를 합쳐 둘로 나누면 좋겠다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참의원 선거는 한국보다 더 드라마틱했다. 2005년 9월 중의원 선거에서 제1야당 민주당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에 무참히 깨졌다. 이 선거에서 집권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은 전 의석의 3분의 2 이상을 휩쓸었다. 그런데 민주당은 2년이 채 안 돼 참의원 선거에서 이를 설욕한 것이다. 민주당이 참의원의 제1당이 됐다는 것은 양원제인 일본에서 자민당 독주의 정국 운영이 불가능해졌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자민당이 굴욕을 당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연금기록 부실관리 문제, 각료들의 잇단 실언과 유력 정치인의 정치자금 스캔들. 그래서 민심이 떠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치 않다.

이유의 전부는 아니지만 자민당의 장기 집권에는 일본 유권자들의 독특한 투표 성향도 한몫하고 있다. 일본 유권자들은 새 인물보다는 관록이 있거나 친분이 있는 인물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에 유독 세습의원과 다선의원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도 강하다. ‘이익유도(利益誘導)’라는 ‘지역구 챙겨 주기’ 관행 때문이다. 챙겨 줄 일은 도시보다 농촌이나 지방에 많고, 야당의원보다는 여당의원이 더 잘해 주기 때문에 농촌이나 지방은 자민당의 든든한 텃밭이었다.

그런데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이런 등식들이 의미를 잃었다. 자민당은 현역의원 위주로 공천해서 ‘국정개혁’의 깃발을 들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새로운 얼굴을 앞세워 ‘생활개혁’을 호소했다. 유권자는 민주당의 손을 들어줬다. 나라살림도 중요하지만 내 살림을 펴 주겠다는 후보를 택한 것이다. 야당이든, 새 인물이든 관계가 없었다.

여촌야도 현상도 깨졌다. 이번 선거에서 1인 선거구는 29곳. 주로 농촌과 지방이다. 자민당은 29개 선거구 모두에, 민주당은 21개 선거구에 후보를 냈다. 자민당은 겨우 6곳을 건졌지만 민주당은 17곳에서 승리했다. 농촌이나 지방에서는 자민당이 강하다는 상식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조용한 반란’ 언제까지 이어질지

하나 더 있다. 민주당의 이번 승리는 민주당 지지자가 늘어나서가 아니다. 평소 자민당 지지자나 무당파(부동층)라고 밝힌 유권자의 표가 민주당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아사히신문의 출구조사에 따르면 자민당 지지자의 25%, 무당파 중 51%가 민주당을 지지한 것으로 밝혀졌다. ‘미워도 다시 한 번’ 자민당에 몰표를 주는 유권자가 줄어들었다는 증거다.

이번 선거에서 일본 유권자들이 보여 준 ‘조용한 반란’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다만 그들은 불침항모라는 자민당에 분명하게 옐로카드를 보여 줬다. 자민당이 역사적 참패를 당한 것만큼이나 이 선거는 일본 선거사에 역사로 남을 것 같다.

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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