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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김창혁]최후의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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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김창혁]최후의 일본인

입력 2007-08-01 20:08수정 2009-09-26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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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원의 ‘일본군 성노예 사과 결의안’ 채택을 주도한 마이크 혼다 의원을 보면서 아사카와 간이치(朝河貫一)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연상의 첫 단추는 두 사람 모두 일본계 미국인이라는 데 있었던 것 같다. 사실 혼다 의원은 일본계 3세고, 아사카와라는 인물은 일본 와세다대의 전신인 도쿄전문대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간 ‘귀화 미국인’이다.

아사카와, 아니 고(故) 아사카와 박사를 알게 된 건 순전히 해양수산부 김연빈 사무관의 덕이다. 김 사무관은 일본의 해양기본법을 뒤지던 필자에게 자기가 번역한 ‘검증-국가전략 없는 일본’이라는 책을 보내줬다. 요미우리신문 정치부가 2005년 1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국가전략을 생각한다’라는 야심 찬 기획물을 내보낸 뒤 단행본으로 발간한 책이다. 그 책 서문에 아사카와 박사가 있었다.

“중국의 대두와 인구감소사회라는 시대의 큰 변화를 목도하면서 러-일 전쟁 직후인 1909년 출판된 ‘경세(警世)의 서(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사카와 간이치(1873∼1948) 박사가 쓴 ‘일본의 화기(禍機)’다.” 흥미로웠다.

위키피디아에는 그가 미 예일대 역사학자이며, 미 주요 대학의 교수가 된 최초의 일본인이라고 돼 있었다. 1796년 조성된 유명한 예일대 구내 그로브 묘지에 유해 일부가 묻혀 있다는 사실과 함께…. 그가 타계했을 때 AP, UPI통신은 ‘현대 일본의 가장 고명한 학자’라고 보도했고, 일본 요코스카 미군기지는 조기(弔旗)를 내걸어 애도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사랑한 조국의 신문들은 지면 한 귀퉁이에 겨우 2, 3줄짜리 부고를 실었을 뿐이다.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아사카와는 일본인들이 기억에서 추방하고 싶은 이름이다. 러-일 전쟁 직후 그는 와세다대 교수였다. 그는 “강의와 연구가 본연의 의무지만 최근 일본의 위기에 대해 아무도 말하려 하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며 ‘일본의 화기’를 썼다. 일본이 청국의 주권 옹호와 열국(列國)의 기회 균등을 대의(大義)로 내세우며 대(對)러시아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 이후엔 가혹한 침략주의 외교로 진보와 평화의 파괴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는 두려워했다.

“일본으로 인해 인류의 행복은 줄어들고, 문명은 오히려 퇴보하며, 차이나는 오랫동안 우리를 원망할 것이고, 세계는 우리를 의심할 것이다.” 그 결과 세계에서 고립되고, 종국엔 미국과 격돌할 우려가 높다고 했다. 그의 두려움은 32년 뒤 태평양전쟁으로 나타났다.

책이 완성됐을 때 와세다대 선배이자 메이지 시대의 문호인 쓰보우치 소요(坪內逍遙)는 “미래에까지 이어질지 모를 위기를 지적한 만큼 ‘화기(禍機)’라고 해야 한다”며 서명(書名)의 단어를 직접 골랐다. 현재의 위기를 넘어 장래 재앙의 조짐이라는 뜻이다.

일본이 그동안 ‘성노예 결의안’을 막기 위해 벌여 온 반(反)문명, 반인륜의 책동들을 보면서 나는 일본의 화기를 걱정한다. 일본의 화기는 일의대수(一衣帶水)의 한반도는 물론 아시아 전체의 공도동망(共倒同亡)을 부를 수밖에 없다. 아사카와 박사의 후배가 쓴 평전(評傳)의 제목이 목에 걸린다. ‘최후의 일본인’(1983년·이와나미). 그가 최후의 일본인이 되지 않길 빈다.

김창혁 논설위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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