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배상근]‘싸우는 노사’엔 미래 없다

  • 입력 2007년 8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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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선진국을 처음으로 경험한 것은 1990년대 초중반 미국 미주리 주의 소도시였다. 여기서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이런 게 선진 국민의 수준이구나’라고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극장 매표소에서 새치기나 암표를 사는 서울을 기억하는 필자에겐 곳곳에서 줄을 길게 늘어선 모습이 다소 낯설었다. 신호등이 없는 사거리에서 차가 서로 마주치면 먼저 온 순서대로 자연스럽게 지나도록 양보하는 모습도 부러웠다.

이런 생각은 뉴욕을 방문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뉴욕 택시운전사의 운전 행태는 기대와는 달리 서울 택시운전사의 뺨을 칠 만큼 난폭했다. 횡단보도에서 보행을 멈추라는 ‘돈트 워크(Don't Walk)’라는 신호등을 두고 ‘걷지 마라’는 의미는 뉴욕에선 ‘뛰어 건너가라’는 뜻이라는 농담을 듣고 뉴욕 사람도 우리와 다를 바 없구나 하고 느꼈다. 한가한 미주리와 바쁜 뉴욕에서 다른 행태가 나타나듯이 생활환경이 사람의 행태를 다르게 만들지 사람이 타고날 때부터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됐다.

사람이 줄을 잘 서게 만드는 사회는 참고 기다리기만 하면 언젠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다는 신뢰를 주는 사회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줄을 서서 기다렸다간 아무것도 구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경험을 준 사회에선 줄을 잘 서지 않거나 새치기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따라서 줄을 서지 않거나 새치기하는 행동을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에서 줄을 서지 않게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 사회에선 다른 선진국처럼 노사 평화나 화합을 이루지 못하고 노조가 전투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근로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얻은 결실을 기업이 독식하고 어용노조가 대화와 타협이란 미명하에 근로자의 이해보다는 기업의 이익을 크게 반영했던 아주 오래전의 경험도 일조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990년대 이전에는 타협, 양보, 대화는 곧 근로자를 위하지 않는 노조의 전유물이었다. 이에 따라 노사 간 신뢰가 구축되지 못했고 끝까지 싸우는 노조만이 근로자를 위한 진짜 노조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처럼 낡은 틀과 인식에 따른 관성의 힘이 우리 노조를 아직도 전투적으로 만드는 요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등장한 지 20년이 지나 성년이 된 지금, 더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새치기를 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코리안이 아니다. 이젠 노사 불신이나 전투적인 노사관계에서 벗어나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말한 것처럼 한 사회의 경쟁력과 효율성을 결정짓는 사회적 자본인 사회구성원 간의 신뢰를 견실하게 구축할 필요가 있다.

한국베링거인겔하임 노사의 신뢰가 아름다운 만남과 갈등 없는 이별로 이어진 사례와 함께 ‘노사는 회사의 번영과 근로조건의 개선을 추구한다’는 도요타 노사공동선언의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 우리도 바람직한 노사관계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견실한 신뢰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선 노사 모두 글로벌 무한경쟁시대에서 기업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더욱 분명하게 공유해야 한다. 다음으로 근로자는 과거의 강성 노조 방식에서 탈피해서 경영진을 과감하게 믿고, 기업인은 근로여건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노사가 대립적 극한관계가 아닌 공동운명체로 뛰면서 기업 발전이 노사 모두의 이익이란 신뢰를 쌓아야만 지속 가능한 노사 화합을 이룰 수 있다. 적대적이고 불신이 가득한 과거의 노사관계가 죽어야만 노사 모두 미래에 살 수 있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경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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