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at!” 칭찬-격려가 숨은 재능을 춤추게 하다

  • 입력 2007년 5월 30일 19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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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생이던 2006년 책임저자이자 제1저자로 과학논문인용색인(SCI)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김건(19) 씨가 미국 매사추세츠 주 렉싱턴 시의 집에서 실험기구를 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고교생이던 2006년 책임저자이자 제1저자로 과학논문인용색인(SCI)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김건(19) 씨가 미국 매사추세츠 주 렉싱턴 시의 집에서 실험기구를 보이며 활짝 웃고 있다.
#1. 1996년 한국. 의기소침한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학원 다니기를 강요하는 건 원치 않았기에 엄마는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가 서툴렀을 뿐일 텐데. 엄마는 학교에 들어간 아들이 의기소침한 외톨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담임선생님은 평가서에 "자신감 부족으로 발표를 자주 하지 않으며 기본 연산력은 좋으나 수리탐구력의 신장을 요함"이라고 썼다. '어릴 적부터 과학책을 유달리 좋아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수십 번이고 읽던 아이인데….'

김건 씨는 누구
● 1987년 9월 24일 출생

● 1997년 도미(초등학교 3학년)

1999년 미국 코네티컷 주 이스트록초등학교 졸업

2002년 매사추세츠 주 다이아몬드중학교 졸업

2006년 매사추세츠 주 렉싱턴고등학교 졸업

2006년 하버드대 입학

● 2004년 매사추세츠 주 과학경시대회 3등

2005∼2006년 매사추세츠 주 과학경시대회 연속 1등

● 2006년 과학논문인용색인(SCI) 학술지 ‘Colloids and

Surfaces A: Physicochem. Eng. Aspects’에 ‘Anti

bubbles: Factors that affect their stability’(안티버

블의 안정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 논문 게재

특히 미술을 못한다는 선생님의 말에 아들은 더 주눅 들었다. 미술 학원을 다닌 적 없으니 못 그리는 것도 당연했건만 꾸지람은 계속됐고 아들은 그림 자체를 싫어하게 됐다.

#2. 2006년 미국. SCI 논문 발표한 고교생

미국 보스턴주 한 공립고교의 한국 학생이 책임저자이자 제1저자로 과학논문인용색인(SCI)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했다고 미국 언론이 흥분했다. 고교생이 SCI 논문을 게재하는 일은 유례가 거의 없는 일. 이 학생은 안티버블(Antibubble)을 오래 유지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요인을 실험으로 찾아냈다. 안티버블은 물이 공기를 둘러싼 물방울과는 달리 공기가 물을 둘러싼 것으로, 그 안에 치료약을 넣어 새로운 약 운반제를 개발할 수도 있는 유용한 현상이다.

이 과학 '천재'는 실험실에 처박힌 외톨이가 아니었다. 그는 학교의 학생의원, 부회장으로 활동할 뿐 아니라 학생토론(debate) 클럽의 일원으로 미국 전역을 누비는 학교 최고의 인기 학생이었다.

10년 전 의기소침했던 김 건(19) 군이다. 부모는 아직도 그가 천재라 불릴만한지 잘 모르겠다는데, 10년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칭찬은 재능도 춤추게 한다

김 군은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97년 미국의 한 연구소에서 일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미국 코네티컷주로 이주했다. 김 군은 영어를 거의 못 했지만 어머니 황정순(45) 씨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집 근처의 시립도서관에서 어린이 책을 빌려 함께 읽었다. 50권 100권 등으로 목표를 높여 달성할 때마다 외식 같은 '작은' 선물로 동기를 부여했다.

보통 조기유학생들이 사립학교에 진학하는 것과 달리 김 군은 공립학교에 입학했다. 학생 대부분 흑인이라 다른 부모는 손사래를 치는 곳이었다. 황 씨는 "어린 건이에게 공부도 중요하지만 미국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낯선 환경을 스스로 이겨내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국 학생이 없다 보니 김 군은 영어를 빨리 배웠고 미국 아이들과도 금방 친해졌다. 특히 학교 선생님의 태도가 한국과 많이 달랐다. 조금만 잘해도,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않아도 아이는 물론 부모에게도 아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 군의 미술 실력에 대한 평가도 불과 1년 만에 완전히 달라졌다. 김 군의 4학년 담임교사는 김 군의 그림마다 "great job!"이라며 칭찬했다. '우쭐해진' 김 군은 집에서도 스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기를 좋아하니 실력도 부쩍 늘었다. 덕분에 고교 시절 김 군의 그림은 학교 전시관에 오랫동안 전시되기도 했다.

조금만 잘해도 칭찬과 격려가 쏟아지자 하루가 다르게 김 군의 자신감이 커졌다. 자신의 특출한 재능을 깨닫기 시작했다. 어릴 적 과학책을 좋아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2003년 10학년(우리의 고교 1학년) 때의 AP(대학 과목 선이수제) 생물학 교사가 김 군의 과학적 재능을 높이 산 게 기폭제가 됐다. 그는 유독 김 군에게 과학 프로젝트를 많이 맡겼다. 김 군은 이 프로젝트로 매사추세츠 주 과학경진대회에서 3등을 차지했다.

11학년 때 새로운 프로젝트 주제를 찾던 김 군의 눈에 안티버블이 눈에 띄었다. 김 군은 곧장 집에 실험실을 차렸다. 6개월간 꼬박 실험했다. 대학 입시가 얼마 안 남은 것이 내심 걱정됐지만 황 씨는 아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도록 격려했다. 어느 날 화학 교사가 흥분하며 황 씨에게 말했다. "건이가 대단한 화학적 발견을 했습니다!" 김 군은 그해 이 실험으로 주 과학경진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고 이 실험을 바탕으로 SCI에 등록된 화학·물리학 저널에 논문을 게재했다. 다음 해에는 전국 과학논문대회에서 준우승을 했고 주 과학경진대회에서 또다시 1등을 차지했다. 이 밖에도 여러 과학대회에서 상을 탔다. 지역신문과 보스턴 글로브, 유에스에이 투데이에 김 군의 이야기가 실렸다.

한국의 초등학교 시절 "자신감 부족으로 발표를 하지 않는다"던 김 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성적보단 잠재력 키워주는 교육제도가 한몫

김 군이 스스로 재능을 발견하고 계발할 수 있었던 것은 성격이 변한 덕분이기도 하다. 김 군을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한 계기는 무엇일까.

김 군은 8학년인 2001년부터 학생토론 클럽활동을 시작했다.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대회에 참가하고 심판도 보고 저학년을 위한 지도교사도 도맡았다. 참가비용의 3분의 1은 직접 일을 해서 벌어야 했기에 주말마다 세차 일을 했다. 방학 때면 두 달간 하루 종일 토론 연습을 했고 토론대회를 위해 자기 지역에 오는 학생을 재워주며 가이드 역할도 했다.

김 군은 탁월한 컴퓨터 실력을 발휘해 고교 홈페이지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재능을 학교를 위해 쓰고 싶었다는" 김 군은 학교 공지사항을 홈페이지에 띄우는 일까지 맡았다. 그동안 학교가 방송으로 해오던 일을 김 군이 홈페이지 시스템으로 바꾼 것이다. 학생들에게 대학진학 정보를 제공하는 사이트도 직접 운영하고 있다(http://admissionchances.com).

어머니 황씨는 "한국처럼 성적이 대학 입시를 좌우하는 교육제도였다면 건이가 이처럼 많은 활동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또 그렇게 공부에만 내몰렸다면 여전히 의기소침한 채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하버드대는 대학수학능력시험(SAT) 만점의 공부벌레만 원하지는 않았다. '사회에 기여할 잠재력과 도전정신, 독특한 인성과 창의성'을 평가했다. 김 군은 지난해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에 모두 합격해 하버드대에 진학했다.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도 공부도 함께 할 있어 정말 좋았다"는 김 군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화학과 교수로부터 안티버블을 함께 연구하자는 제안을 받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경영학이든 법학이든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어요. 그 뒤에도 과학이 좋다면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의사가 되고 싶어요. 제 동생이 신체장애를 앓고 있거든요."

칭찬으로 춤춘 재능을 환자 치료에 쓰고 싶다는 김 군. 세계의 천재들이 모인 하버드대에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 왜 한국인 안가는 공립고에…

2005년 교육부 집계에 따르면 한국 조기유학생 3만5144명 중 35%가 미국으로 갔다. 많은 조기유학생들이 아이비리그에 합격하기 위해 명문 사립고교나 영재고교에 진학한다. 영재고 진학설명회와 고교 입시 준비학원도 성황이다.

그러나 막상 명문 사립학교에 다닌다 해도 심리적 부담으로 중도에 포기하는 한국 학생이 많다. 명문대 진학에 대한 기대로 학교 수업보다 참고서와 학원에 의지하는 한국식 공부를 강요하는 부모도 많다. 전문가들은 이런 방식으로는 토론과 참여를 중시하는 미국 교육환경에 적응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김 건(19) 군은 이와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협동 참여 자율을 중시하는 미국 교육환경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면서 뒤늦게 재능을 발견한 전형적인 사례다. 소수인종이 많아 한국인이 꺼리는 공립학교에 진학한 덕분에 빨리 영어를 배웠을 뿐 아니라 미국 문화에 비교적 쉽게 적응했다.

어머니 황정순(45) 씨는 조기유학을 준비하는 부모들에게 공립학교 진학 여건만 된다면 사립학교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조언했다. 우수한 사립학교는 비용이 많이 들 뿐 아니라 아이가 주눅이 들어 자신감을 잃은 채 낙오할 우려가 많다는 것. 특히 미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외톨이가 되거나 한국 학생끼리 몰려다니면서 탈선의 길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그는 "사립이든 일반 공립이든 아이비리그에 입학하는 학생 수는 거의 비슷하다"며 "우수한 공립학교를 선택할 것"을 권했다. 또한 한국학생들이 집착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SAT)의 점수도 명문대 진학의 필요과정일 뿐 충분과정은 아니라는 것이 미국 교육전문가들의 얘기다.

윤완준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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