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피천득 선생의 ‘책 읽어 주는 여자’ 손소정 씨

  • 입력 2007년 5월 29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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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 레몽 장의 소설 ‘책 읽어 주는 여자’는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 주는 일을 하는 여성을 통해 사람이 맺는 관계를 성찰하는 작품이다. 25일 별세한 수필가 피천득 서울대 명예교수에게도 ‘책 읽어 주는 여자’가 있었다.

장례 기간 내내 서울아산병원 빈소를 찾아 눈물을 쏟은 손소정(25) 씨. 4월 말 고인이 폐렴으로 입원하기 직전까지 1년 동안 고인과 꾸준하게 만났다. 작가지망생인 손 씨는 창작을 지도하는 수필가 김훈동 씨에게서 고인을 소개받았다.

“피 선생님이 눈이 나빠져 책을 읽지 못하시는데 누군가 읽어 주면 좋겠다고 하셔서 제가 하게 됐습니다.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갔는데 다음 날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놀랐어요.”

28일 통화에서 손 씨는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게 아직도 실감이 안 난다”면서 몇 번이나 목이 멨다.

손 씨는 일주일에 두세 번 선생의 자택을 방문해 한 시간씩 책을 읽어 드렸다고 한다. 선생은 권오분 씨의 ‘제비꽃 편지’, 신영복 씨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과 고인의 수필집 ‘인연’ ‘어린 벗에게’ 등을 골라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들으시다가 좋은 부분이 나오면 밑줄을 그어 달라고 하시고, 접어놓아 달라고도 하시고… 며칠 뒤에 접어 놨던 부분을 다시 읽어 달라고도 하셨어요.”

지난달 고인에게 읽어 드린 ‘마지막 책’은 고인이 번역한 영미시를 엮은 ‘내가 사랑하는 시’였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앨프리드 테니슨의 ‘모래톱을 건너며’, 윌리엄 블레이크의 ‘천진의 노래’ 등을 들으면서 선생은 행복한 표정이었다고 손 씨는 돌아봤다.

성악과 학생이지만 작가가 되기를 꿈꾸면서 습작에 열심인 손 씨는 고인에게서 배운 게 많다. 사랑하는 문학작품을 귀로라도 듣고 싶어했던 열정, 주변 사람들을 소중하게 생각했던 다감한 마음씨를 손 씨는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다.

“매사에 불평 한번 하신 적 없고 늘 칭찬만 하셨고, 늘 좋은 것만 바라보는 긍정적인 분이셨어요. ‘글쓰기 공부는 어떻게 되어 가느냐’면서 챙겨 주시고 걱정해 주시고….”

말을 맺지 못하고 손 씨는 울먹였다. 또 하나의 ‘인연’에게 감동을 주고 선생은 떠났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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