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재경]KBS는 시청자에게 손 벌릴 자격 있나

  • 입력 2007년 5월 29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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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료 인상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KBS와 정부가 나섰다. 2012년까지 디지털 방송체제를 완성하려면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국내 방송사는 그동안 수신료 인상과 중간광고 허용을 요구해 왔다. 시청료와 광고 제도를 흔드는 변화는 기술적인 요인 때문에 1980년대 초부터 고정된 국내 방송의 기본 틀을 바꿔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다. 국내 방송의 기본 틀은 근본적인 수정이 필요하다. 그 내용에 시청료가 포함돼야 함은 물론이다. 광고 문제 역시 주요 쟁점이어야 한다. 하지만 기술적 요인만을 고려한 재원확보 방안 차원의 변화는 너무 지엽적이고 미봉적이다. 시청자의 호주머니를 짜서 KBS가 사용할 투자비용을 더 확보하겠다는 것 이외에 사회적 이득을 찾기 어렵다.

단순하게 비교하면 국내 방송의 시청료는 싼 편이다. 공영방송제의 종주국인 영국의 국민은 1년에 132파운드, 우리 돈으로 25만 원 정도의 시청료를 낸다. 소득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월 2500원인 국내 시청료의 8배에 이르는 액수다. 우리도 시청료를 더 낼 수 있는 여력은 있다.

문제는 어떠한 방송을 위해서 시청료를 부담하는가이다. 시청료를 부과하는 공영방송은 두 가지 확고한 원칙 위에서 운영해야 한다. 1926년 BBC가 출범하면서부터 영국식 공영방송에서 흔들리지 않았던 원칙이다. 하나는 정부와 정파로부터의 독립이고, 다른 하나는 상업적 이익, 돈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영국의 비싼 시청료는 두 가지 원칙을 지키는 대가로 시청자가 동의한 비용이다.

KBS는 이러한 조건을 갖추고 있는가. 한국의 공영방송은 과연 얼마만큼 방송법이 밝힌 공영제도의 이상을 실현하고 있는가. 이 시점에서 KBS와 정부가 추진하는 시청료 인상에 동의하지 않는 국민이 많은 이유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뿌리 깊기 때문이다.

한국의 공영방송은 전두환 정부의 언론통폐합 조치와 맞물려 탄생했다. 그리고 5공화국 기간 내내 정권의 직접 관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름은 공영이지만 운영은 관영보다 더한 청와대 직영 방송이었다. 절대로 정권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는 뿌리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1980년대 말 방송민주화 투쟁과 노동조합의 강화, 김대중 정부 초기 새롭게 제정한 방송법 등을 통해 조금은 공영적인 지배구조를 갖추게 됐다. 그러나 이사진의 임명과 사장 선임 등 인사 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정부와 정당의 지배력이 강력하게 유지되는 현실이다. 제도적으로 방송의 정치적 독립은 실천된 적이 없다.

돈으로부터의 독립은 보장됐는가. 지난해 KBS 재원의 절반 이상은 시청료가 아닌 광고수입이었다. 20여 년 전 공영방송 초기와 비교하면 광고의 비중이 크게 늘었다. 시청료가 묶여 있어 어쩔 수 없는 결과이지만 방송의 재정적 독립은 더욱 취약해졌다. 제작현장에서 프로그램의 공익성이나 사회적 의미보다 시청률을 더 의식해야 하는 모습 또한 부인하기 어려운 추세다.

공영방송의 기본 틀에 대한 토론은 정치로부터의 독립과 돈으로부터의 독립, 이 두 가지 원칙을 바탕에 두고 진행해야 한다. 5공화국적인 관영적 공영이면 세금을 사용하는 편이 옳고, 광고에 의지하는 상업적 공영이면 시청료를 인상할 게 아니라 폐지하는 게 맞는 방향이다.

이런 논의와 선택의 주체는 KBS나 정부보다는 시청자와 시민이어야 한다. 미봉적인 시청료 인상은 다시 기형적인 한국식 공영방송 제도를 연장할 뿐이다. 제대로 된 공영방송을 위한 근본적인 논의의 시작을 기대한다.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 언론홍보영상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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