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천하장사 마돈나

  • 입력 2007년 5월 29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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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말이 되나요? 섹시한 여성의 상징인 팝 가수 마돈나. 그녀가 천하장사라니요?

재치만점에다 진한 감동까지 안겨주는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 이 영화의 제목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인 듯 보입니다.

하지만 아세요? 이 모순 같은 제목에, 알고보면 슬픈 뜻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요.

이 영화 속 소년은 마돈나처럼 섹시한 여성이 되기 위해 씨름이라는 가장 남성적인 관문을 통과해야만 하는 얄궂은 운명에 놓여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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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토리라인

고등학교 1학년 오동구(류덕환). 힘세고 몸도 우람한 동구의 장래 희망은 ‘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팝 가수 마돈나처럼 섹시한 여자로 성전환해 평소 짝사랑하는 일본어 선생님 앞에 당당히 서는 것이죠.

하지만 현실은 막막하기만 합니다. 동구는 쌀가마니를 나르는 아르바이트로 성전환수술 비용을 푼푼이 모으지만, 아직 500만 원이란 큰돈이 모자랍니다. 바로 이때, 씨름대회에서 우승하면 장학금 500만 원을 받는다는 희소식이 들려옵니다. 학교 씨름부에 들어간 동구. 그러나 씨름부 선배들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습니다. 씨름부 감독(백윤식)은 씨름 지도엔 관심도 없는 한량입니다.

이걸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해야 할까요? 씨름대회를 앞두고 동구의 아버지는 아들이 여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집니다. 실패한 권투선수 출신인 아버지는 동구를 미친 듯이 때리면서 뒤틀린 자기 삶에 대한 분노와 슬픔을 토해내죠.

드디어 씨름대회가 열리는 날. 동구는 시퍼렇게 멍든 눈으로 간신히 대회에 참가합니다. 동구에겐 이제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2] 핵심 콕콕 찌르기

이 영화엔 주연과 조연이 따로 없어 보입니다. 동구는 물론 그의 주변 인물들도 모두 자기 인생의 참된 주인공들인 것처럼 비치죠. 수많은 등장인물 사이에 숨어있는 빛나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것, 이게 바로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파악하는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등장인물들을 살펴볼까요? 동구는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남자, 즉 성적 소수자입니다. 동구의 아버지는 실패한 인생을 탓하며 하루하루 술에 의지해 사는 사회의 패배자입니다. 집을 뛰쳐나온 어머니도 놀이공원 직원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죠.

씨름부 선배들도 다를 바 없습니다. 실력이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간지럼을 지나치게 타는 ‘민감한’ 겨드랑이 탓에 씨름선수론 애당초 부적격인 선배도 있죠(이 선배는 ‘박 차고 나온 놈이 천하장사 되겠네’라는 긴 이름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동구의 단짝 친구인 ‘종만’이도 특종 기자, 씨름선수, 개그맨, 랩 가수에 이르기까지 허구한 날 꿈을 바꾸며 뜬구름 잡는 삶을 반복합니다.

이들 인물엔 어떤 공통분모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이들은 예외 없이 ‘사회적 소수(minority·마이너리티)’이자 ‘패배자(loser·루저)’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겐 더 큰 공통점이 있습니다. 거듭되는 좌절과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언가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죠. 꿈. 바로 이 영화의 키워드입니다.

우리는 동구가 품은 꿈을 바라보는 이 영화의 독특한 시각을 주목해야 합니다. 동구는 친구 종만에게 말합니다.

“내 희망? 너 그게 나한테 얼마나 잔인한지 알아?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야.”

진정 탁월한 대사가 아닐까요? 여자가 되고픈 동구의 꿈은 우리가 입발림처럼 말하는 ‘꿈’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우주를 여행하겠다든지, 대통령이 되겠다든지, 서울대에 가겠다든지 하는 꿈은 이뤄지면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사는데 큰 불편은 없는 꿈입니다.

하지만 동구의 꿈은 다릅니다. 그의 말마따나 ‘잔인한’ 꿈이죠.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속에 유전자처럼 박혀 있던 ‘여자가 되고픈 욕망’. 자신도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이런 성적(性的) 지향 때문에 동구는 평생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그러기에 동구의 꿈은 대통령이나 의사가 되고픈 것처럼 ‘뭔가가 되고 싶은’ 꿈이 아닙니다. 자신의 본능적인 욕망에 순응하면서, 여자로 ‘그냥 살고 싶은’ 꿈인 것입니다. 아, 이 얼마나 소박하고도 필사적인 꿈인가요?

이런 뜻에서 동구가 부단히 연습하는 씨름기술 ‘뒤집기’는 중요한 영화적 장치이자 강력한 암시입니다. 통쾌한 뒤집기 기술처럼 동구는 자신의 인생도 언젠간 멋지게 뒤집기 하리라고 영화는 예언하죠.

[3] 종횡무진 생각하기

이 영화는 여장을 한 동구가 마돈나의 대표곡 ‘라이크 어 버진(Like a Virgin)’을 부르는 감동적인 장면으로 막을 내립니다. 동구가 성공적으로 성전환수술을 받고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게 된다는 암시죠. 동구는 ‘트랜스젠더(transgender·성전환자)’가 된 겁니다.

여기서 영화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통쾌하게 깨부숩니다. 우리는 보통 ‘트랜스젠더’라고 하면 가수 ‘하리수’처럼 예쁘고 섹시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남자로 태어났지만 평소 얼굴도 몸매도 너무나 예뻐서 남자보단 여자로 사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 사람들 말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우리의 뿌리 깊은 고정관념을 180도 뒤집습니다. 몸은 ‘천하장사’지만 마음은 ‘마돈나’인 동구를 통해서 말입니다. 뚱뚱한 데다 힘도 엄청나게 센 동구가 공교롭게도 섹시한 여자가 되길 간절히 바라다니! 모순이라고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성 취향은 단지 외모로만 단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정신과 심장, 세포 하나하나에 숙명처럼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씨름팬티에다 브래지어 차림으로 거울을 바라보는 동구의 모습은 영화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집약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성성의 상징인 씨름팬티와 여성성의 상징인 브래지어, 이 둘이 기묘하고도 아름다운 동거를 하다니 말입니다!

세상에 이루지 못할 꿈이란 없습니다. 다만 꿈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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