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원의 펄프픽션]30세기 우주서 20세기 지구를 고민하다

  • 입력 2007년 5월 26일 03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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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대표적인 SF 작가이자 잡지 ‘SF 호라이즌스’의 편집장이었던 브라이언 올디스는 “SF란 혼란스럽고 진보한 미래의 우주 공간에서 인간의 변하지 않는 정의와 위상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단순히 ‘외(外)우주’를 배경으로 설정한다고 해서 SF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내(內)우주’를 담아내야만 진정한 SF라는 것이다.

SF는 대부분 ‘미래’와 ‘우주’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그중에서 걸작으로 칭송되는 SF는 ‘현재’의 ‘지구’를 고민한다.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의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 역시 시간적으로는 30세기경, 공간적으로는 수백 개의 항성계를 배경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본질적인 주제는 20세기의 현실에서 찾고 있다.

30세기의 우주는 전쟁과 음모, 계급과 차별이 끊이질 않는 디스토피아이다. 주인공 마일즈는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어 걸핏하면 뼈가 부러지는 난쟁이다. 동시에 천재적인 두뇌와 재치를 겸비한 인물로, 바라야 제국 백작가의 장손이기도 하다. 사회적으로는 최상층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신체적으로 콤플렉스를 지닌 양면적인 인물 마일즈는 부푼 꿈을 갖고 사관학교에 지원하지만, 돌연변이라는 이유로 좌절하고 만다. 이후 가신들과 함께 우주를 항해하던 마일즈는 우여곡절 끝에 덴다리 용병대를 조직해서 수훈을 세우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게 된다.

‘마일즈의 전쟁’(행복한책읽기)은 연대기적으로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의 시작에 해당한다. 작가는 마일즈를 주인공으로 다룬 장편을 14편 발표했다. 이 시리즈를 통해서 휴고상 4회, 네뷸러상 1회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휴고상과 네뷸러상은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과학소설상으로, 윌리엄 깁슨,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과 같은 SF계의 거장들이 수상한 바 있다.

21세기에는 소설은 물론 영화, 게임 등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에서 SF가 창작의 보고로 각광받고 있다. 아쉽게도 지난 100년간 한국 문단에서 생산되고 소비된 SF의 양은 실로 미미하다. 리얼리즘이 우대받을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특수한 현대사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본래 우리의 이야기 전통에는 SF적인 상상력이 흐르고 있다. 서천서역이나 용궁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본풀이(서사무가)나 고전소설은 모두 한국형 SF의 원형으로 활용될 만하다. 홍길동이나 전우치가 활약하는 한국형 SF를 기대해 본다.

한혜원 계원조형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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